어쩌면 가장 먼 유목은 긴 머무름에서 시작됐을지 몰라… 이선희 《노마디즘》
익숙한 풍경은 어느 순간 풍경이기를 멈춥니다. 늘 바라보던 한라산은 일상이 되고, 바다는 배경이 됩니다. 이선희의 작업은 그런 익숙함을 다시 흔듭니다. 서울 인사동 제주갤러리에서 7월 2일 시작하는 개인전 《노마디즘》입니다. 제주에 정착한 화가가 전시 제목으로 내건 단어는 '유목'입니다. 언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그 낯섦은 조금씩 풀립니다. 전시장에는 한라산과 협재, 명월성, 쇠소깍, 귤밭이 놓였습니다. 모두 익숙한 곳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림은 익숙한 질서를 따르지 않습니다. 고양이는 바다와 오름을 넘나들고, 물고기는 허공을 헤엄칩니다. 서로 다른 계절과 공간도 하나의 회화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합니다. 현실의 질서는 한발 물러서고 기억과 상상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그렇게 제주란 곳은 우리가 알고 있던 풍경에서 벗어나 이선희만의 언어로 다시 태어납니다. ■ 같은 풍경, 다른 시선 대표 연작 〈아무튼, 한라산부터 시작합시다〉는 바다에서 바라본 한라산에서 출발했습니다. 같은 산도 바라보는 자리가 달라지면 전혀 다른 인상을 남깁니다. 그 작은 차이가 작업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제주에 처음 도착했던 날 눈에 들어온 해녀의 테왁은 형광빛 주황으로 살아났고, 연꽃잎에서 가져온 프레임은 시간과 공간을 엮는 조형 요소가 됐습니다. 탐라순력도의 시선과 민화의 공간감도 현대적인 색채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집니다. 풍경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었습니다. ■ 머무는 동안 시작된 변화 '노마디즘(Nomadism)'은 이 전시에서 이동보다 변화에 가까운 의미를 갖습니다. 삶은 제주에 자리 잡았지만, 작업은 한곳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회화에서 자수로, 증강현실(AR)로. 표현 방식은 계속 넓어졌고 작업은 새로운 매체를 만나며 또 다른 가능성이란 영역을 열었습니다. 이번에 처음 공개하는 AR 작품 〈잊혀진 숲〉은 그 변화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평면 위에 머물던 회화는 공간으로 확장되고, 관람객은 작품 안을 거닐며 또 다른 감각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 전시가 말하는 유목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스스로의 작업을 한곳에 머물게 두지 않는 태도인지 모릅니다. ■ 제주, 그리고 이후 이선희는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뒤 서울과 광주, 전남을 오가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펼쳐왔습니다. 2010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열두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2021년 제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뒤 제주문화예술재단 예술공간 이아 레지던시에 참여하며 '제주시리즈'를 본격화했습니다. 올해는 제주시 원도심 입주작가로 활동하며 지역과 호흡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2026 제주갤러리 공모 선정 이후 처음 마련한 개인전입니다. 제주는 화가를 떠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같은 그림에 머무르게도 하지 않았습니다. 《노마디즘》은 가장 멀리 떠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래 머문 사람이 끝내 가장 먼 곳까지 자신의 회화를 밀고 간 기록입니다. 전시는 7월 20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제주갤러리에서 이어집니다. 오프닝은 7월 2일 오후 3시에 열리며,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입니다(월요일 휴관).
2026-06-30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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