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빨리 잊는다… 그래서 전시는 이제 커지지 않고, 내려온다
요즘 전시는 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아집니다. 더 웅장해진 미술관과 더 거대해진 아트페어 바깥에서, 전시는 점점 낮은 곳으로 내려옵니다. 동네 골목으로, 개인의 생활 반경으로, 걸어갈 수 있는 거리 안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제주시 원도심 무근성 마을, 관덕로 3길의 작은 공간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에서 15일부터 시작하는 전시는 이런 흐름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OHHO 빈공간 아트페어 2026’입니다. 37명의 작가가 참여해 1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이 자리는, 작품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예술이 다시 자기 속도로 숨 쉬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 무엇을 더하지 않고, 비운다 전시장에는 작가 이름이나 작품 설명도 없습니다. 대신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길게 열려 있고, 월요일에는 문을 닫습니다. 이 리듬은 관람객을 서두르게 하지 않습니다. 예약을 하고 들어가야 하는 방식 역시 사람의 흐름을 일부러 늦춥니다. 설명이 빠지자 반응이 남았고, 정보가 빠지자 감각이 남습니다. ■ 37명의 작가, 150점의 작품… 중심은 ‘많음’이 아니다 김을, 정정엽, 김태헌, 김월식, 박해빈 같은 중견 작가부터 양동규, 이애리, 박길주, 박정근, 여다함, 김기대, 전선영, 안수연, 김현준, 조향미, 한용환, 현초인 등 제주와 육지를 오가며 활동하는 작가들까지, 세대와 매체가 섞여 있습니다. 회화, 판화, 드로잉, 사진, 오브제, 조각까지 저마다 형식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설명 없이도 오래 서 있게 만듭니다. ■ 작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볼 가능성을 연다 작품은 전시 기간 내내 판매됩니다. 가격은 대부분 10만 원대에서 100만 원 내외입니다. 할인이나 접근성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라, 작품이 거실과 방과 책상 옆으로 들어올 수 있는 거리입니다. 동네 전시장에서 생애 첫 작품을 사는 사람이 매년 늘어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이유입니다. ■ 무근성이라는 동네, 전시를 가능하게 하다 이번 전시는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가 아니라 무근성이라는 동네 안에 놓여 있습니다. 제주목 관아 옆, 관광 동선에서 살짝 비켜난 골목입니다. 청주의 ‘APT 빈공간’과 서귀포의 ‘키위새 스테이션’이 함께 협력하지만, 중심은 언제나 이 골목입니다. 전시를 보러 오기보다, 걷다가 들어오는 발길들입니다. 그래서 관람객은 소비자가 아니라 자연스레 머무는 사람이 됩니다. 전시장을 나올 때 누군가는 가격표를 다시 봤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고, 어떤 이는 그냥 골목을 한 바퀴 더 돌아봅니다. 나는 아마 마지막 부류일 것 같습니다. 작품보다 먼저 기억에 남는 건 말이 줄어든 시간입니다. 누가 좋은지, 무엇이 중요한지도 묻지 않고 그저 오래 서 있었다는 감각이 몸에 남습니다. 아마 전시는 그 정도를 원할 법합니다. 무언가를 남기기보다, 덜어낸 상태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이 전시는 기억에 남지 않는 방식으로 남습니다. 나는 그날 전시를 보고 나온 게 아니라, 조금 다른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낄 보폭을, 이미 몸이 먼저 그리고 있습니다. ■ 이 전시가 가능해진 건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은 2022년 3월 문을 열었습니다. 원도심 무근성 마을, 제주목 관아 옆 골목에 자리 잡은 이 공간은 전시장이면서 동시에 작업실이고, 기획실이며, 동네의 문화 실험실에 가깝습니다. 개관 이후 자체 기획전을 중심으로 운영해 왔고, 문화예술재단과 공공 지원을 통해 창작 기반을 확장해 왔습니다. 202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공간 지원을 받았고, 2025년에는 제주문화예술재단 창작공간 프로그램 지원을 받아 동시대 미술을 다루는 기획전을 연속으로 선보였습니다. 작지만 이 공간이 꾸준히 주목받는 이유는, 유행보다 문제의식을, 이벤트보다 맥락을 우선해 왔기 때문입니다. ■ 이 공간을 만든 사람 이상홍 대표는 8년 전 제주로 이주한 시각예술가입니다. 칠성로에서 보낸 시간 동안 동네를 관찰하고 기록하며 사유해 왔고, 그 시간이 지금의 ‘빈공간’으로 이어졌습니다. 드로잉을 중심으로 한 개인 작업을 지속하는 한편, 전시를 통해 예술가와 예술 애호가, 기획자와 실천가들이 만나는 자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공간을 소유하지 않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운영해 왔습니다. 이 대표는 “동네는 배경이 아니라 내용이고, 공간은 그 내용을 드러내는 도구”라며 “작품을 보여주기보다, 작품이 살아갈 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말합니다.
2026-01-14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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