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아들은 어머니를 먹었다… 그 여자가 사라진 뒤에도 차려진 식탁
오백 명의 아들이 어머니를 먹었습니다. 국을 끓이던 어머니가 솥에 빠져 죽었고, 아들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국을 먹었습니다. 제주 신화의 이 기이한 식탁에는 한 사람의 생애가 통째로 빠져 있습니다. 오백 명을 먹인 여자는 정작 무엇을 먹으며 살았을까. 세상을 만들 만큼 거대한 존재에게도 자신의 삶을 꾸릴 시간이 있었을까. 신화는 아들들의 운명을 따라 흘러갑니다. 어머니는 그들이 먹은 국의 일부가 된 뒤 이야기에서 사라집니다. 시인 장혜령은 바로 그 대목에서 서사의 방향을 틉니다. 영웅들의 행적 대신 솥 앞에 서 있던 여자의 시간을 헤아립니다. 창세의 장엄함에 장보기와 식사 준비의 문제가 끼어들자, 신화는 갑자기 오늘의 부엌만큼 가까워집니다. 장혜령의 두 번째 시집 『횟빛횟빛』(난다)은 이처럼 이야기의 초점을 옮겨놓는 책입니다. 신화 속 국솥에서 현대의 주방으로, 어머니의 병실에서 국가폭력의 현장으로, 필리핀 여성의 전화영어 수업에서 멧비둘기의 둥지로 시야가 넓어집니다. 서로 다른 장소와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들이 42편의 시를 가로지릅니다. 그들을 잇는 것은 하나의 비극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상을 떠받치고도 그 일상의 주인공으로 호명되지 못했던 시간입니다. 이 시집의 성취는 사라진 사람들을 다시 불러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시인은 타인의 생애를 대신 설명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쉽게 믿지 않습니다. 딸이 아는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사람의 일부이고, 피해자의 고통은 시인의 언어보다 깊으며, 새의 울음은 인간이 붙인 뜻보다 멀리 갑니다. 『횟빛횟빛』은 그 거리를 억지로 좁히기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새롭게 드러나는 낯섦을 시의 동력으로 삼습니다. 첫 시집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이후 5년. 서울을 떠나 제주에 정착한 장혜령은 어머니의 투병과 자신의 질병을 겪었습니다. 제7회 부마항쟁문학상 수상작 「침묵의 샴쌍둥이」를 비롯한 관련 작품 네 편과 여러 미발표작이 묶인 이번 시집에는 그 시간의 압력과 사유의 변화가 새겨져 있습니다. 책의 이름인 ‘횟빛횟빛’은 시인의 집 보일러실에 둥지를 튼 비둘기 가족의 울음에서 비롯됐습니다. 사전에 등재된 새소리도, 뜻을 명료하게 풀이할 수 있는 낱말도 아닙니다. 알아듣기 쉬운 말로 다듬는 대신 그 낯선 발음을 제목에 걸었습니다. 세계에는 인간의 이해를 통과하지 않고도 제 소리로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다는 듯이. ■ 세상을 만든 여자는 왜 국솥 앞에 있었나 「태초에 국을 끓이는 여자가 있었으니」는 제주 신화 속 오백 아들의 어머니를 다시 불러냅니다. 거대한 솥에 빠져 죽은 어머니와 그 국을 먹은 아들들. 비극의 결말은 알려져 있지만, 장혜령의 시선은 신화가 건너뛴 일상의 세목에 머뭅니다. 오백 명이 먹을 국을 끓이려면 장은 얼마나 봐야 할까. 그 많은 재료를 씻고 다듬고 불을 지피는 동안 어머니는 언제 쉬었을까. 창세의 규모로 펼쳐지던 이야기가 느닷없이 장바구니와 부엌의 높이로 내려옵니다. 그 순간 신화 속 거대한 어머니는 세상을 떠받치는 초월적 존재이기에 앞서, 매일 누군가의 끼니를 책임져야 했던 한 사람이 됩니다. 아들들이 어머니를 먹었다는 결말은 충격적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한 여자의 시간과 노동은 이미 오래도록 다른 이들의 생존에 쓰이고 있었습니다. 페미니즘 경제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재생산’은 사람을 먹이고 돌보며 다음 날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을 포함합니다. 사회가 지속되는 데 필수적이지만, 오랫동안 가정 안에서 사랑과 헌신의 이름으로 여겨진 일들입니다. 식탁에 오른 음식은 보이지만, 그 한 끼를 마련하는 데 들인 시간은 좀처럼 헤아려지지 않습니다. 장혜령은 어머니를 숭고한 모성의 상징으로 떠받들기보다 그가 감당했을 노동의 무게를 묻습니다. 아들들의 운명은 이야기로 남았지만, 어머니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포기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신화에서 침묵은 생략이 아닙니다. 누구의 삶을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왔는지 드러내는 빈자리입니다. 「어느 아무의 아무」에서는 그 질문이 역사로 옮겨갑니다. ‘흰옷을 입은 민족’이라는 익숙한 표상 뒤에는 옷을 빨고 삶고 널었던 여성들의 손이 있습니다. 흰옷은 민족의 이미지로 남았지만, 그 흰색을 지켜낸 사람들의 하루는 역사에 좀처럼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시가 부르는 ‘아무’는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분명히 살았으나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 사람들, 타인의 삶을 가능하게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시간을 이야기할 자리를 얻지 못한 이들입니다. 흰옷은 역사에 남고 그 옷을 빨던 손은 사라졌습니다. 그 어긋남을 붙듭니다. 무엇이 기록할 만한 사건으로 남았고, 누구의 하루는 기록할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여겨졌는가. 시가 겨누는 것은 역사의 빈칸만이 아니라, 그 빈칸을 만들어온 기록의 기준입니다. ■ 서랍도 없는 어둠, 부엌의 시간은 어디에 보관되는가 『횟빛횟빛』에서 부엌은 생활의 중심이면서 기억의 사각지대입니다. 「부엌의 역사」에는 아일랜드 테이블과 냉장고, 서랍처럼 현대적인 주방을 이루는 사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익숙한 물건들이 시 안으로 들어오자 본래의 쓰임이 어긋나고, 예상 밖의 이미지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중에서도 ‘서랍도 없는 어둠’이라는 표현은 쉽게 지나칠 수 없습니다. 서랍은 보관의 질서를 전제합니다. 무엇을 넣었는지 알고, 필요할 때 다시 꺼낼 수 있도록 칸을 나눕니다. 그러나 서랍조차 없는 어둠에는 분류할 자리도, 이름을 붙일 표면도 없습니다. 그곳에 쌓인 시간을 꺼내 보이려면 먼저 그것을 담아둘 공간부터 찾아야 합니다. 식사는 하루 세 번 돌아오고, 설거지는 끝나는 순간 다음 설거지를 예고합니다. 한 끼를 마련한 손길은 음식이 사라지면 함께 지워집니다. 식탁은 다시 깨끗해지지만 그곳에서 흘러간 한 사람의 오후까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장혜령은 주방의 물건들을 낯선 조합 속에 놓아 그 보이지 않는 소모를 감각하게 합니다. 제주 신화의 국솥과 현대의 아일랜드 테이블 사이에는 수많은 세대가 지나갔습니다. 조리 도구와 공간의 배치는 달라졌어도 부엌에서 보낸 시간을 한 사람의 생애로 헤아리는 일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엌의 모든 순간을 억압으로 환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를 먹이고 싶은 마음, 같은 일을 거듭하며 쌓인 피로, 말없이 건넨 애정과 때로는 그 애정 때문에 생겨난 원망이 한 공간에서 뒤엉킵니다. 시인은 사물의 자리를 조금씩 뒤틀어 그 복잡한 감정의 지층을 드러냅니다. ■ 모래알 엄마, 딸의 기억보다 넓은 한 사람의 삶 이번 시집의 변화는 장혜령 자신의 경험과도 긴밀하게 맞물립니다. 서울에서 제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뒤 어머니의 투병과 자신의 질병을 겪었습니다. 특히 2024년 의료 공백이 이어지던 시기에는 병원에서 어머니를 돌보며 원고를 마감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늙고 아픈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고 어떻게 쓸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밝힙니다. 가까운 사람의 병을 지켜보는 일에는 사랑과 연민만 있는 게 아닙니다. 회복을 바라는 마음 옆으로 두려움이 스며들고, 오래 지속되는 간병 속에서 피로와 무력감이 생겨납니다. 문학으로 옮길 때에는 또 다른 위험이 따릅니다. 어머니의 고통이 딸의 슬픔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가 되거나, 아픈 몸이 누군가의 깨달음을 위한 소재로 축소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래알 엄마」는 바로 그 경계에서 쓰인 시로 읽힙니다. 화자는 아래로 떨어지는 감각 속에서 어머니와 마주합니다. 이야기는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그것을 모으려는 마음은 번번이 손가락 사이의 틈을 확인하게 됩니다. 모래는 움켜쥘수록 빠져나갑니다. 작은 알갱이 하나하나를 구별하기도 어렵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 역시 딸이 목격한 장면과 들은 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함께 살아온 시간이 길다고 해서 그 기억이 어머니의 전 생애와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의 섬세함은 모녀 관계를 하나의 진실로 정리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딸의 눈앞에 있는 어머니와 딸이 알지 못하는 어머니 사이에는 긴 시간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 간격을 인정할 때 어머니는 비로소 누군가의 보호자나 환자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자기 생애를 지닌 사람으로 다가옵니다. 시집의 또 다른 작품 「사랑」에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눈길이 이렇게 담겨 있습니다. “엄마는 / 보자기에 알사탕처럼 / 어둠을 감쌉니다” 알사탕은 작고 달지만, 보자기에 싸인 것은 어둠입니다. 단맛을 떠올리게 하는 사물과 빛이 닿지 않는 공간이 하나로 겹쳐집니다. 어머니의 손길은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합니다. 감싸온 것이 가족의 기쁨만은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이 뒤따릅니다. 병원에서 돌아온 뒤 새벽 네 시 부엌에서 국을 끓이던 어머니의 뒷모습도 이 시구와 나란히 놓입니다. 가족을 먹이고 싶은 애정과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책임이 그 손길에 함께 배어듭니다. 장혜령은 어느 한쪽을 정답으로 고르지 않습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감춰졌던 수고를 들여다보면서도 그 사랑 자체의 온기까지 지워버리지 않습니다.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그 어느 쪽도 상대의 삶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 시들의 바탕을 이룹니다. ■ 손톱으로 밑줄을 긋는 여자, 허락받지 않은 독서 「사랑은 누구의 것인가?」에는 남자가 없는 시간에만 책을 읽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책에 밑줄을 긋는 일조차 자유롭지 못한 관계에서 그는 손톱으로 읽은 자리를 표시합니다. 이 장면의 힘은 동작의 작음에서 나옵니다. 책을 펼치는 것과 그 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은 다릅니다. 읽을 수는 있어도 표시할 수 없다면 독서는 여전히 누군가가 정해놓은 경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여자는 필기구 대신 자신의 몸으로 그 경계를 긋습니다. 손톱의 자국은 연필이나 펜의 밑줄처럼 또렷하지는 않습니다. 종이에 희미한 눌림만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흔적은 분명한 사실을 전합니다. 누군가 이 문장을 읽었고, 여기에서 멈췄으며, 자신의 생각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장혜령이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여성의 글쓰기와 번역의 문제도 여기에 응축돼 있습니다. 산문집 『여자는 왜 모래로 쓰는가』에서 다뤘던 물음은 이번 시집에서 책 한 권을 둘러싼 구체적인 권력관계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목소리극’을 통해 문자 기록의 바깥에 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공연으로 옮겨온 작업과도 연결됩니다. 손톱으로 그은 밑줄은 공적인 기록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읽은 시간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역사책에 이름이 실리지 않은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려 했으나, 그 흔적을 받아 적을 자리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 시에서 가장 날카로운 것은 여자가 책을 읽는다는 사실보다 그 독서를 숨겨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사유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자리에서 손톱은 조용한 필기구가 됩니다. 말보다 먼저 종이에 닿은 몸이 자신의 존재를 증언합니다. ■ 국가폭력의 침묵, 국경을 건너는 목소리 『횟빛횟빛』에는 제7회 부마항쟁문학상 수상작 「침묵의 샴쌍둥이」를 비롯한 관련 작품 네 편이 수록됐습니다. 국가폭력에 따른 고통과 억압을 다룬 작품들은 시집의 시야를 가족과 일상의 울타리 너머로 넓힙니다. 2부의 제목은 「한 여자의 불가능한 서정시」입니다. 「체제의 눈」, 「포르노그래피 복제시대의 서정시」, 「갇힌 여자」, 「식민」, 「말하는 여자」 등에서는 국가와 제도, 디지털 기술, 여성의 몸을 둘러싼 권력이 서로 다른 얼굴로 나타납니다. 이 지점에서 ‘불가능한 서정’이라는 말은 역설적이기도 합니다. 서정시는 오랫동안 개인의 내면과 감정을 노래하는 형식으로 이해돼 왔습니다. 그렇지만 폭력의 피해를 다루는 순간, 아름답게 쓰는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시인의 감동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정작 당사자의 삶이 다시 밀려날 위험이 생깁니다. 장혜령은 이 불편한 문제를 작품의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국가폭력과 디지털 성착취, 가정 안의 불평등은 각기 다른 책임의 구조를 지닙니다. 시인은 그 차이를 지우지 않은 채 사람의 몸과 말할 권리가 통제되는 방식을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그 관심은 「전화영어」에서 국경을 넘습니다. 영어를 가르치는 고학력 필리핀 여성들이 등장하고, 와이파이 공유기의 불빛 아래에서 목소리가 통신망을 타고 먼 곳의 일상으로 흘러갑니다. 누군가에게는 집에서 편리하게 이용하는 학습 서비스입니다. 그러나 화면과 수화기 너머에는 자신의 시간을 들여 수업을 준비하고 말을 건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목소리의 이동과 몸의 위치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말은 순식간에 국경을 통과하지만, 그 말을 생산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과 노동의 조건 속에 있습니다. 통신 기술은 거리를 압축할 수 있어도 그 안의 경제적 격차까지 없애지는 못합니다. 제주 신화의 국솥과 필리핀 여성의 와이파이 공유기는 전혀 다른 시대의 물건입니다. 그럼에도 두 사물은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의 이면을 비춥니다. 하나는 식사를 가능하게 한 손을, 다른 하나는 원활한 통신 뒤에 있는 몸과 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장혜령의 시선은 눈앞의 결과를 지나,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람에게 가닿습니다. ■ ‘횟빛횟빛’, 인간의 말로 다 옮길 수 없는 울음 시집 후반부에 이르면 인간의 역사와 생활을 따라가던 시선이 다른 생명에게로 뻗어갑니다. 「있을 리 없는 새」는 그 변화가 선명한 작품입니다. 얼음이 없는 곳에서 얼음을 치고,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을 두드리듯 우는 새. 익숙한 자연의 조건이 어긋난 세계입니다. 기후위기의 풍경을 연상시키지만 새는 환경 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표지로만 기능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 몸과 감각을 지닌 생명입니다. 사람은 새소리를 듣고 기쁨이나 슬픔, 경고와 부름을 짐작합니다. 하지만 그 해석이 새의 경험과 정확히 일치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인간이 이해한 만큼만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 탓입니다. ‘횟빛횟빛’이라는 말은 그 거리감에서 생겨납니다. 어떤 색을 연상시키면서도 분명한 빛깔로 고정되지 않고, 울음소리처럼 들리면서도 익숙한 의성어의 틀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발음은 뜻보다 먼저 귀에 닿습니다. 독자는 그 소리를 해석하려다가 오히려 해석되지 않는 부분과 마주합니다. 그런 낯섦을 작품의 결함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어가 모든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고 옮길 수 있다는 믿음을 흔듭니다. 앞서 등장한 비둘기 가족의 사연에는 뜻밖의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인은 새끼들이 자라는 동안 에어컨 실외기의 열기와 소음이 해로울까 염려해 아예 집을 비웠습니다. 한 계절이 지나 비둘기들이 날아간 뒤에야 돌아와 둥지의 흔적을 치웠습니다. 자신의 집에 들어온 낯선 생명을 내쫓는 대신 스스로 자리를 내줬습니다. 인간에게는 집의 부속 공간이었지만, 비둘기에게는 새끼를 낳고 기르는 터전이었습니다. 시인은 그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따지기보다 자신에게 익숙한 생활의 질서를 잠시 바꾸었습니다. 이 선택은 앞서 살핀 여성들의 삶과도 조심스럽게 맞닿습니다. 역사에서 지워진 노동을 헤아리는 일과 다른 종의 생존을 배려하는 일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두 경우 모두 자신의 편의와 경험을 세계의 당연한 기준으로 삼지 않으려는 태도를 요구합니다. 『횟빛횟빛』은 그 익숙한 기준이 흔들리는 자리에서, 그동안 듣지 못했던 존재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횟빛횟빛』의 서정은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보다 이해의 한계 앞에서 귀를 닫지 않는 태도입니다. 새가 인간의 뜻을 기다리지 않고 울듯, 시도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씩 벗어납니다. ■ 처음과 끝의 0부, 잘못 배달된 노래에 답장하는 마음 『횟빛횟빛』의 목차에는 독특한 장치가 있습니다. 네 개의 본편 앞뒤에 각각 0부를 놓았습니다. 첫 0부의 제목은 「어디에도 없는, 그래서 어디에나 있는」, 마지막 0부는 「그 아무 겨울에 답장하려고」입니다. 0에서 출발해 다시 0으로 돌아오는 구성입니다. 처음과 끝의 0은 시집을 읽고 돌아온 독자에게 이전과 다른 의미로 읽힐 수 있습니다. 0은 아무것도 없다는 표시이자, 동시에 아직 셈해지지 않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숫자입니다. 시집의 앞쪽에는 이름을 얻지 못한 여성들이 있고, 마지막에는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모르는 답장이 있습니다. 두 자리 사이에서 독자는 누락된 삶과 전달되지 못한 말들을 차례로 만납니다. 마지막 시 「아무 겨울이 가면」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앞으로 잘못 배달된 / 노래에 답장하고 / 싶을 때가 있다.” 노래는 도착했지만 보낸 이의 주소를 알 수 없습니다. 겨울은 지나갔고, 답장을 보내려는 마음은 뒤늦게 생겨납니다. 잘못 찾아온 노래에 기어이 답하려는 마음은 시집의 처음과 끝을 은밀하게 잇습니다. 오래전에 살았던 여성의 생애를 온전히 복원할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가 겪은 시간을 딸이 모두 알 수 없듯, 역사적 폭력의 기억도 한 편의 시로 남김없이 전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목소리가 자신에게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로운 관계가 시작됩니다. 화자는 답장을 보낼 주소가 없다는 이유로 노래를 없던 일로 돌리지 않습니다. 전달될 가능성이 희미해도 응답을 생각합니다. 이때 시 쓰기는 지나간 시간을 재현하는 기술보다 뒤늦게 도착한 말에 자신의 언어로 답하는 일이 됩니다. 시집에 수록된 「있을 리 없는 새」의 영어 번역본 ‘Impossible Bird’도 이 맥락에서 눈길을 끕니다. 최민지의 번역을 거쳐 한국어로 쓰인 시는 다른 언어의 독자에게 건너갑니다. 언어가 바뀌면 소리의 결도 달라지지만, 그 차이 속에서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번역 역시 원문을 그대로 복제하기보다 또 다른 청자를 찾아가는 일일 수 있습니다. 지나간 겨울에 보내려는 답장처럼, 시는 도착을 장담할 수 없는 곳을 향해 말을 건넵니다. 장혜령은 오는 11월 13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중구 알라딘 빌딩 1층에서 『횟빛횟빛』 출간 기념 ‘작가와의 만남’을 엽니다. 신유진 작가가 사회를 맡습니다. ■ 오백 아들이 국을 다 먹은 뒤 장혜령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하고 2017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첫 시집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와 소설 『진주』, 산문집 『사랑의 잔상들』 『여자는 왜 모래로 쓰는가』 등을 펴냈습니다. 영화와 문학, 공연과 목소리극을 넘나든 이력은 이번 시집에서 서로 다른 생애와 감각을 한 권에 엮어내는 솜씨로 이어집니다. 신화의 재구성과 병실의 기억, 역사적 폭력과 새의 울음은 각기 다른 리듬으로 펼쳐집니다.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시키지 않고 저마다의 결을 살리는 데서 이번 시집의 미학적 성취가 드러납니다. 어머니에게는 딸이 알지 못하는 삶이 있고, 이름 없는 여성들의 하루는 역사책의 문장보다 복잡합니다. 멧비둘기는 인간이 붙인 뜻과 무관하게 제 소리로 웁니다. 장혜령은 그 차이를 지우는 대신 시의 형식 안에 들여놓습니다. 첫머리에는 역사에 적히지 않은 ‘아무’가 있습니다. 끝에는 잘못 배달된 노래에 답장하려는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여자들은 음식을 만들고, 손톱으로 책에 밑줄을 긋고, 병실의 하루를 견디며, 국경 너머로 목소리를 보냅니다. 어느 생애도 타인의 삶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소모되지 않도록 시는 저마다의 호흡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새가 웁니다. 횟빛횟빛. 제주 신화 속 오백 아들은 어머니를 먹고 살아남았습니다. 그 뒤에도 세상은 계속됐습니다. 사람들은 밥을 먹고 집을 짓고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식탁을 차린 손이 사라졌어도 다음 끼니는 돌아왔고, 이야기는 살아남은 이들의 행적을 따라 흘러갔습니다. 장혜령은 그 흐름이 건너뛴 시간을 들여다봅니다. 오백 아들이 국을 다 먹은 뒤, 그릇을 치우고 식탁을 닦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신화는 그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횟빛횟빛』은 바로 그 말해지지 않은 시간에서 시작합니다. 난다시편 열한 번째 책. 128쪽에 시 42편을 실었습니다.
2026-10-30
제주방송 김지훈 (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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