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 한 포기를 오래 바라봤다”… 제주 세 화가가 1년 동안 서로에게 물은 것
마당에 저절로 자란 풀 한 포기를 오래 지켜본 화가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숲에서 경험한 두려움과 눈부신 빛을 기억하는 화가, 바람이 지나간 뒤에도 몸에 남은 감각을 그림으로 옮기려는 화가도 있습니다. 세 사람은 제주에서 자연을 바라보며 서로 다른 질문을 품었습니다. 누군가는 생명의 가치를 묻고, 누군가는 기억 속 장소를 되찾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회화로 옮깁니다. 김용주·전영실·박길주가 오는 5일부터 12월 20일까지 제주돌문화공원 갤러리 누보에서 《숨: 땅, 숲, 바람》을 선보입니다. 숲과 풀, 바람을 경험한 세 사람의 시간이 회화와 드로잉, 영상, 설치 작업으로 펼쳐집니다. 세 작가와 기획자는 지난 1년여 동안 매달 만났습니다. 서로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숲을 함께 걸으며 작업에 관한 생각과 질문을 나눴습니다. 무엇을 그렸는지와 함께 왜 그 대상을 오래 바라보았는지, 그 시간이 작품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이번 전시는 그 질문을 따라갑니다. ■ 김용주, 어린 시절 숲의 어둠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김용주가 회화로 되살리는 숲은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의 숲입니다. 어린 시절 그곳에서 경험한 서늘한 어둠과 눈부신 빛,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오랜 시간을 지나 작업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같은 장소를 다시 찾더라도 어린 시절 보았던 숲을 그대로 만날 수는 없습니다. 나무는 자라고 풍경은 달라집니다. 그곳을 바라보는 사람 역시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감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숲의 생김새보다 어둠 속에서 느꼈던 두려움이 선명하고, 빛이 비치던 순간의 놀라움이 오래 기억되기도 합니다. 김용주의 회화에는 그 기억의 작용이 스며 있습니다. 숲은 나무와 빛으로 이루어진 장소이지만,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몸에도 흔적을 남깁니다. 어둠이 짙어질 때의 긴장감, 나뭇가지 사이로 빛이 들어오던 순간의 감각은 시간이 지나도 기억 속에서 되살아납니다. 김용주는 어린 시절의 숲을 현재의 시선으로 다시 불러냅니다. 기억은 과거를 그대로 보존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험은 희미해지고, 어떤 감정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림에는 그때의 숲과 그 숲을 기억하는 지금의 시간이 함께 흐릅니다. ■ 전영실, 잡초라는 이름은 누가 붙였을까 전영실의 관심은 마당에 자라난 잡초 한 포기에서 시작됐습니다. 누가 심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돌본 것도 아닌 식물입니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에게는 뽑아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 작은 생명을 오래 관찰하면서 존엄과 죽음,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잡초라는 이름부터 인간의 판단이 개입돼 있습니다. 어떤 식물이 잡초로 불리는 이유는 대개 그 식물의 생김새보다 자라난 장소와 인간의 필요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원하지 않는 곳에 뿌리내렸다는 이유로 제거의 대상이 됩니다. 전영실은 그 익숙한 판단을 잠시 유보합니다. 뽑아내기 전에 바라보고, 쓸모를 따지기 전에 살아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둡니다. 이러한 관찰은 드로잉과 회화, 영상과 설치 작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인간에게 유용한 존재만이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가.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는 생명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가. 전영실의 작업은 마당의 작은 풀 한 포기에서 출발해 우리가 생명의 가치를 판단하는 방식을 되묻습니다. 잡초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평소에는 지나쳤던 생명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작은 존재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는 바라보는 사람의 선택으로 돌아옵니다. ■ 박길주, 바람이 지나간 뒤에도 몸은 기억한다 박길주는 한 장소에 머물며 빛과 바람, 주변 생명들의 움직임을 관찰합니다. 주목하는 건 시간이 지난 뒤에도 몸에 남아 있는 감각입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나뭇잎과 기울어지는 풀, 피부에 닿는 공기의 변화로 그 존재를 알아차립니다. 바람이 멎으면 움직임도 사라지지만 그 순간의 경험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박길주는 몸에 남은 감각이 어떻게 회화의 행위로 옮겨가는지 탐색합니다. 눈으로 본 풍경은 기억 속에서 달라집니다.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감각이 붓을 움직이는 동안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관찰할 때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감각을 찾아갑니다. 빛과 바람, 주변 생명들의 움직임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몸에 흔적을 남깁니다. 화가는 그 흔적을 따라 붓을 움직입니다. 중요한 질문은 바람의 모양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보다 바람을 경험한 몸이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 세 사람이 함께 보낸 1년, 작품은 무엇이 달라졌을까 김용주는 과거의 숲을 기억하고, 전영실은 눈앞의 작은 생명을 관찰하며, 박길주는 지나간 움직임이 남긴 감각을 되짚습니다. 세 작가는 지난 1년여 동안 매달 만나 작업을 공유했습니다. 서로 작업실을 찾아가고 숲을 함께 걸으며 자신의 작업을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혼자 작업할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을 나누고, 서로 다른 표현 방식을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송정희 갤러리 누보 대표는 “지난 1년여 동안 매달 만나 서로의 작업을 들여다보고, 생각을 나누고, 창작의 과정을 함께하며 AI 시대에 완성된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과정 자체로서 예술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었다”고 기획 취지를 전했습니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짧은 지시만으로도 정교한 이미지를 제작합니다. 그렇다면 이미지 생산과 변형이 빨라진 환경에서 화가가 관찰하고 기억하며 작업하는 시간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숲에서 느낀 두려움이 회화로 돌아오고, 마당의 잡초가 생명에 관한 사유로 이어지며, 몸에 남은 바람이 손끝의 움직임으로 바뀝니다. 세 작가가 함께 보낸 1년은 완성된 작품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배경이 됩니다. 그동안 나눈 질문이 각자의 표현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번 전시의 관람 포인트입니다. ■ 제주에서 시작된 세 개의 시선, 예술의 경계를 묻다 전시가 열리는 제주돌문화공원은 제주의 돌과 숲, 바람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관람객은 자연 속에 자리한 전시장에서 세 작가가 각자의 방식으로 바라본 자연을 만납니다. 김용주의 숲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전영실의 잡초에는 생명의 가치를 둘러싼 질문이, 박길주의 바람에는 몸이 간직한 감각이 담깁니다. 같은 자연을 바라보면서도 세 작가가 발견한 것은 서로 달랐습니다. 그 차이가 이번 전시를 이루는 세 개의 목소리입니다. 전시와 연계한 제1회 제주청년예술포럼도 오는 11일 오후 3시 갤러리 누보에서 열립니다. 'Beyond Borders'를 주제로 5명의 연사가 참여해 AI 시대 예술 창작의 의미와 지역 예술가들의 국제적 활동 가능성을 논의합니다. 세 작가와 기획자가 지난 1년간의 공동 기획 과정을 돌아보는 자리도 마련됩니다. 전시는 갤러리 누보와 도레미컴퍼니, 제주청년예술포럼 조직위원회가 공동 주최하고 제주대학교 글로컬대학사업단이 지원합니다. 《숨: 땅, 숲, 바람》이라는 제목에서 '숨'은 살아 있는 존재의 호흡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래 바라보고 기억하고 그리는 동안 이어지는 예술가의 시간도 생각하게 합니다. 어린 시절 숲의 어둠은 기억으로, 마당의 잡초는 생명에 관한 질문으로, 지나간 바람은 몸의 감각으로 돌아옵니다. 세 작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붙잡은 자연의 시간이 제주돌문화공원의 전시장에 모입니다. 전시는 5일부터 12월 20일까지 이어지며, 개막 행사는 7일 오후 4시입니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이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합니다. 수요일에는 제주돌문화공원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으며, 개막일에는 전시 초대장 소지자에 한해 공원 입장료가 면제됩니다.
2026-11-03
제주방송 김지훈 (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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