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 감각하는 시대는 끝났다… 성북동에 열린 ‘포스트휴먼’ 전시장
서울 성북동의 한 전시장에 인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세계가 들어섰습니다. 몸은 데이터와 맞닿고, 빛은 물질의 표면을 통과합니다. 자연은 기술의 언어와 부딪힙니다. 인공지능과 기후위기, 유전공학과 가상현실이 더 이상 먼 미래의 단어가 아닌 시대, 청년 작가들이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아온 오래된 감각을 작품 앞에 다시 세웠습니다. 2026 서울청년비엔날레 본전시 《포스트-휴먼(Post-Human)》이 지난 4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갤러리 반디트라소에서 개막했습니다. 올해 주제는 ‘인간 너머의 감각: 유동하는 존재들의 연대(Senses Beyond the Human)’입니다. 인간 이후 세계를 상상한다기보다, 인간이 더 이상 혼자 세계를 설명할 수 없는 시대의 감각을 붙잡는 전시입니다. 전시가 더 눈길을 끄는 이유는 예술감독 예미킴(Yemi Kim)의 달라진 자리에도 있습니다. 2024년 서울청년비엔날레에서 미술평론가상을 받은 작가가 2026년에는 22명의 청년 작가를 묶어 전시의 방향을 설계하는 예술감독으로 돌아왔습니다. 청년 작가가 전시 참가자에서 기획의 중심으로 이동한 사례라는 점에서, 올해 비엔날레는 전시 자체보다 더 큰 흐름을 품고 있습니다. ■ 인간의 자리, 전시장 안에서 다시 흔들리다 전시는 ‘포스트휴먼’을 미래 기술에 대한 장식적인 구호로 쓰지 않습니다.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기계, 몸과 데이터, 자연과 인공의 경계가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현실에서 출발합니다. 근대 이후 인간은 세계를 해석하고 통제하는 주체로 여겨져 왔습니다. 자연은 관찰과 개발의 대상이었고, 기술은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는 도구로 이해됐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판단과 창작의 일부를 수행하고, 기후위기는 인간의 삶이 지구 생태계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팬데믹 이후 몸은 개인의 소유물에 머물지 않고 접촉, 감염, 돌봄, 통제의 관계망 안에서 다시 읽히고 있습니다. 성북동의 전시장은 이 변화의 감각을 작품으로 번역해 드러냅니다.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미래를 향한 공상이 아니라 이미 도착한 현실의 균열입니다. 인간이 중심을 차지하던 세계는 작품 앞에서 조금씩 밀려납니다. 예술감독 예미킴은 “AI와 기후위기, 팬데믹을 거치며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흔들리고 있다”며 “청년 작가들은 이러한 변화와 균열을 가장 예민하게 포착하는 세대”라고 말했습니다. ■ ‘유동’과 ‘연대’가 만나는 자리 전시의 핵심어는 ‘유동’과 ‘연대’입니다. 유동은 흔히 불안정의 언어로 들릴 수 있습니다. 정체성도, 관계도, 노동도, 삶의 기반도 쉽게 고정되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전시는 이 단어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 읽게 만듭니다. 흐른다는 것은 무너진다는 뜻만 갖지 않습니다. 다른 존재에게 스며들고, 또 다른 감각에 닿거나, 낯선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도 함께 지닙니다. 예미킴은 “장르와 매체는 물론 존재의 범주까지 경계에 놓인 작업들에 주목했다”며 “‘유동’과 ‘연대’는 상반된 개념처럼 보이지만, 고정된 것들끼리는 서로 닿기 어렵다. 오히려 흘러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말은 전시의 방향을 압축합니다. 전시는 인간과 기술, 생태와 사물, 몸과 가상공간을 따로 설정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떻게 부딪히고, 스며들고, 다시 연결되는지를 살피게 합니다. ■ 청년 작가 22명, 미래보다 먼저 ‘지금의 변형’을 보다 본전시에는 김경현, 김상엽, 김서영, 김유경, 김이주, 김형근, 김화정, 모유진, 문수민, 박정희, 박태준, 배하람, 서예현, 소희준, 심한울, 유화수, 이지혜, 임수빈, 장성민, 정채령, 최유리 등 22명의 청년 작가가 참여했습니다. 작가들은 인공지능과 유전공학, 기후위기, 데이터, 가상현실 등 동시대의 급격한 변화를 각자의 방식으로 다룹니다. 회화와 조각, 설치 등 서로 다른 작업 방식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맺는 새로운 관계를 탐색합니다. 이 전시에서 청년은 ‘나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작가들은 미래를 대표하는 세대라는 말로만 호출되지도 않습니다. 이미 변해버린 세계의 한복판에서 작업하는 창작 주체입니다. 빠르게 변하는 기술 환경, 불안정한 창작 기반, 낡은 제도와 새로운 감각 사이에서 자기 언어를 밀어붙이는 세대입니다. 그래서 전시는 청년 미술을 굳이 ‘새롭다’는 말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더 불편한 질문을 꺼냅니다. AI가 이미 이미지를 만들고, 데이터가 삶의 경로를 예측하며, 기후가 일상의 리듬을 바꾸는 시대에 회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조각은 어떤 몸을 세울 수 있고, 설치는 인간만의 공간으로 여겨졌던 전시장을 어떤 존재들의 임시 거처로 바꿀 수 있는가. 전시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예단하거나 제시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감각하게 합니다. ■ 수상 작가에서 예술감독으로, 예미킴의 달라진 자리 올해 비엔날레를 다르게 보게 하는 이름은 예미킴입니다. 예미킴은 2024년 서울청년비엔날레에서 미술평론가상을 받은 작가입니다. 당시 예미킴은 자신의 작업으로 비엔날레 안에 위치를 각인시켰습니다. 올해는 전시의 방향을 짜고, 22명의 청년 작가가 던지는 질문을 수렴하는 예술감독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미킴의 복귀는 비엔날레의 성격을 또렷하게 만듭니다. 청년 작가를 보여주는 무대를 넘어, 청년 세대가 직접 전시의 언어와 감각, 담론의 방향을 짜는 흐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작업 궤적 역시도 주제와 맞물립니다. 예미킴은 KAIST에서 건설환경공학과 산업공학을 전공한 뒤 시각예술 현장으로 옮겨왔습니다. 구조를 읽는 공학과 감각을 밀어 올리는 예술의 언어가 이미 작업 안에서 쉼 없이 부딪혀왔습니다. 2023년에는 제주 빛의벙커 미디어아트 전시 《피어나다》를 선보였고, 2024년 서울청년비엔날레에서는 미술평론가상을 받았습니다. 빛과 공간, 구조와 이미지, 기술과 몸을 오가며 쌓아온 시간의 겹이 올해 ‘포스트-휴먼’이라는 주제 안으로 들어온 셈입니다. 여기서 제주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등장합니다. 전시는 서울에서 열리지만, 지역의 시선으로 따라가야 할 이유가 예미킴에게 있습니다. 제주 빛의벙커 작업을 거친 작가가 서울청년비엔날레의 예술감독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은 단지 지역 예술가의 성공담만은 아닙니다. 지역에서 감각한 빛과 공간, 자연과 기술의 접점이 서울 청년미술의 담론 안으로 들어온 한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제주는 인간이 자연을 이겼다고만 말하기 어려운 장소입니다. 바람은 삶의 방향을 바꾸고, 현무암은 시간의 단면을 드러냅니다. 바다는 이동과 단절을 동시에 품습니다. 개발과 보전, 관광과 생태, 풍경과 생존·소멸이 한 공간 안에서 공존하며 충돌합니다. 예미킴의 포스트휴먼이 공허한 이론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이 자연과 기술, 물질과 데이터 사이에서 어떻게 다시 배치되는지를 묻는 감각이 그 기획 안에 생생하게 놓입니다. 예미킴의 역할은 이 지점에서 더 또렷해집니다. 작품을 설명하는 데 머무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의 감각이 부딪히는 장소를 여는 기획자입니다. 청년 작가들의 작업을 한 방향으로 몰아세우기보다, 각자의 균열이 서로 닿을 수 있는 전시의 조건을 만드는 쪽에 서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역에서 온 작가가 서울의 무대에 섰다는 표면적인 서사가 아닙니다. 지역에서 길어 올린 감각이 동시대 미술의 언어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입니다. 2024년 수상 작가였던 예미킴이 2026년 예술감독으로 돌아온 변화는 서울청년비엔날레가 청년을 소개하는 전시에서 청년이 스스로 세계를 해석하는 전시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한복판에 예미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 때문에, 서울의 전시이면서도 제주에서 다시 읽어야 할 전시로 남습니다. ■ 포스트휴먼, 인간을 지우는 말이 아니라 세계를 넓히는 말 포스트휴먼은 인간 이후의 폐허를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지우자는 주장도 아닙니다. 인간이 더 이상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인식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홀로 완성된 존재가 아닙니다. 몸은 환경과 연결되고, 감각은 기술을 통과하며, 삶은 다른 생명과 사물, 제도와 물질의 관계 속에서 계속 바뀝니다. 이번 전시는 바로 그 얽힘을 미술의 언어로 바라봅니다. 흥미로운 건 전시가 이런 문제의식을 설명문처럼 앞세우지 않는 데 있습니다. 작품들은 개념을 선언하기보다 감각을 먼저 열어둡니다. 관객은 전시장 안에서 어떤 이미지 앞에 멈추고, 어떤 표면을 지나며, 어떤 낯선 물질의 존재감을 마주합니다. 인간의 감각이라고 믿어온 것들은 정말 인간만의 것이었는지, 자연은 언제부터 인간 바깥의 풍경으로 밀려났는지, 기술은 여전히 손에 쥔 도구에 머무는지. 전시는 이 질문들을 설명하지 않고, 관객이 작품 사이를 지나며 몸으로 먼저 만나게 합니다. ■ 본상 시상과 특별전으로 이어지는 비엔날레 서울청년비엔날레 조직위원회에 따르면 본전시 참여 작가는 미술평론가 추천과 공모를 거쳐 최종 선발됐습니다. 본상 시상은 8월 22일 오후 4시 전시장 현장에서 진행되며, 수상자는 미술평론가들의 심사 점수를 합산해 결정됩니다. 서울청년비엔날레는 2024년 첫 전시 이후 청년 작가 중심의 발표 무대를 표방해왔습니다. 올해 전시는 그 방향을 더 밀도 있게 이어갑니다. 청년을 가능성이란 이름으로만 부르지 않고, 동시대 미술이 먼저 감지해야 할 변화의 징후를 작가들의 작업 안에서 찾습니다. 올해 본전시 《포스트-휴먼(Post-Human)》은 서울 성북구 성북동 갤러리 반디트라소에서 오는 8월말까지 열립니다. 본전시와 함께 예-공189갤러리 청소년 아티스트전, 10월 예정된 특별전으로 이어집니다. ■ 성북동에서 시작된 감각 2026 서울청년비엔날레 본전시는 전시장을 하나의 질문으로 바꿉니다. 인간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인지, 기술은 인간의 바깥에 있는지, 자연은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에 머무는지, 비인간 존재와 연대한다는 말은 예술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가능한지 묻습니다. 전시는 답을 서둘러 닫지 않고, 관객이 다른 감각의 속도로 작품 사이를 지나가게 합니다. 보는 일은 판단보다 먼저 오고, 느끼는 일은 설명보다 오래 남습니다. 성북동에 놓인 ‘포스트-휴먼’은 인간 이후의 세계를 멀리 상상하기보다, 인간 곁에 이미 도착한 다른 존재들을 감각하게 합니다. AI와 풀, 몸과 데이터, 조각과 숨, 회화와 기후가 같은 공간에 놓일 때 예술은 인간을 낮추는 대신 세계를 넓힙니다. 그 넓어진 자리에서 청년 작가 22명의 작업은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같은 시대의 균열을 가리킵니다. 어쩌면 인간만 감각한다고 믿어온 시대는, 이미 끝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2026-07-08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