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타고 구름을 가르는 돼지, 달을 등에 지고 선 닭… 고은이 빚은 열두 개의 얼굴을 만났다
돼지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 초록 구름을 건넙니다. 노란 호랑이의 몸에는 검은 줄무늬와 꽃무늬가 얽히고, 치켜든 꼬리는 회백색 운무를 뚫고 솟습니다. 붉은 빛 속 수탉은 둥근 달을 등진 채 바위에 발을 딛습니다. 꽃으로 채운 몸통과 검은 볏, 길게 뻗은 꼬리깃이 붉은 밤을 팽팽하게 당깁니다. 제주 출신 한국화가 고은이 꺼내든 십이지(十二支)입니다. 태어난 해와 함께 불려 온 띠의 동물들은 서로 다른 표정과 지나온 날을 품고 그림 속으로 들어섭니다. 돼지는 호랑이 등에 기대고, 닭은 달을 지며, 꽃과 나비는 그 곁을 오갑니다. 고은 작가의 제18회 한국화전 《꽃으로 피어나는 시간》이 7일부터 서울 종로구 아트로직스페이스에서 열립니다. 장지 위에 분채를 올린 채색화 20점을 선보입니다. 작가는 전통 민화의 십이지와 꽃, 나비, 달, 구름 속에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서 길어 올린 애정을 담았습니다. 한 정원에 모인 열두 지신은 표정도, 걸음도, 꽃이 피는 때도 제각각입니다. ■ 등 위의 돼지, 달 뒤의 수탉 초록빛 바탕에서 돼지는 호랑이 위에 느긋하게 몸을 싣습니다. 발톱을 세운 호랑이가 구름을 밟는 동안, 돼지는 주저함 없이 그 등을 탑니다. 힘센 짐승과 그 위에 오른 돼지의 조합은 민화 특유의 익살을 끌어냅니다. 호랑이는 등을 내주고, 돼지는 태연합니다. 거친 힘과 느긋한 몸짓이 어우러지며 묘한 동행이 만들어집니다. 수탉은 붉은빛 속에서 달을 등 뒤에 걸고 바위 위에 섭니다. 치켜든 볏과 노란 꼬리깃은 위로 뻗고, 꽃무늬는 몸통을 따라 번집니다. 둥근 달의 윤곽과 바위의 날카로운 선 사이에서 수탉의 자태가 도드라집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는 열두 지신을 신화적 존재가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으로 의인화하여 표현하였다”고 설명했습니다. 동물마다 다른 몸짓과 눈빛에는 함께 살아온 날들의 자국이 남습니다. ■ 초록은 구름을 일으키고, 붉은빛은 밤을 붙들어 색이 전시를 이끕니다. 회백색 운무가 길게 흐르는 초록 바탕에서는 노랑과 검정이 힘 있게 튀어 오릅니다. 붉은 면에서는 흰 달과 검은 볏, 노란 꼬리깃이 맞물리며 수탉의 존재감을 밀어 올립니다. 초록은 운무에 깊이를 보태고, 붉은빛은 수탉이 선 곳을 또렷하게 밀어냅니다. 굵은 먹선은 동물의 털과 깃, 바위의 모서리, 구름의 굴곡을 가르며 색의 경계를 정합니다. 몸통을 메운 꽃무늬와 가는 선은 넓게 펼쳐진 색면에 촘촘한 밀도를 더합니다. 장지 위에 올린 분채는 선명한 온도를 만들고, 수묵의 필선은 그 사이를 가볍게 가로지릅니다. 분채와 필선이 맞닿는 곳마다 꽃과 운무, 바위와 동물은 제각기 다른 박자를 냅니다. ■ 꽃은 기억을 품고, 나비는 시간을 건너 《꽃으로 피어나는 시간》은 한 계절 안에서도 서로 다르게 익어가는 열두 지신을 바라봅니다. 꽃에는 개성과 오래 쌓인 흔적이 스며 있고, 나비는 변화와 성장, 희망을 향해 날아갑니다. 경험은 몸짓에 남고, 살아낸 날들은 눈빛을 바꿉니다. 꽃 피는 때는 저마다 엇갈립니다. 긴 기다림을 지난 뒤에야 제 빛깔을 드러내는 모습도 있습니다. 작가는 이들을 한 공간에 둡니다. 엇갈린 시간들이 스치며 사뭇 다정한 온기를 만듭니다. 십이지는 삶의 이력을 불러오는 이름입니다. 띠의 순서보다 열두 얼굴이 함께 빚은 계절의 풍경이 더 선명하게 남습니다. ■ 제주에서 이어온 18번째 채색화 작가는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대학교를 졸업한 뒤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한국화를 공부했습니다. 이후 제주를 기반으로 장지와 분채를 활용한 채색화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18번째 개인전에서 고은은 십이지를 빌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향한 애정을 풀어냈습니다. 장지 위의 분채와 먹선, 익살스러운 동물의 몸짓은 제주에서 이어온 작가의 채색화 감각을 보여줍니다. 《꽃으로 피어나는 시간》은 12일까지 이어집니다.
2026-07-07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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