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를 나온 작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도예가는 흙을 빚습니다. 하지만 작품은 혼자 완성되지 않습니다. 제주에서 활동하는 도예가 이혜지는 다섯 번째 개인전 《골목 가장 안쪽의 온기》에서 공예의 완성을 가마가 아니라 사람의 삶에서 찾습니다. 흙은 불을 지나 형태를 얻지만, 누군가의 식탁에 오르고 손에 익으며 생활의 일부가 되는 시간이 더해질 때 공예는 비로소 완성됩니다. 지난 21일부터 제주시 산지로 갤러리 레미콘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는 그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전시장에는 그릇과 화병, 스툴, 테이블이 놓여 있습니다. 모두 형태를 갖췄습니다. 그러나 작가에게 작품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누군가의 집으로 들어가 하루를 함께 살아가고, 애착을 품으며 비로소 자신의 시간을 얻을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골목 가장 안쪽의 온기》는 집을 보여주는 전시가 아닙니다. 이번 전시에서 집은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시간이 쌓여가는 방식입니다. 기물은 그 시간을 담는 가장 오래된 그릇입니다. ■ 기물은 물건이 아니라 시간을 받아들이는 그릇이었다 전시에서 가장 오래 눈에 들어오는 작업은 거대한 조형물이 아닙니다. 〈일상기물 모음집〉과 〈In Between〉 연작입니다. 그릇과 화병, 스툴, 테이블. 모두 집 안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물의 형태입니다. 특별한 상징이나 화려한 조형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대신 작가는 가장 평범한 기물을 통해 집이라는 시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여다봅니다. 그 출발점은 사물의 '쓰임'입니다. 작가는 이번 작업을 준비하며 집 안에서 사물들이 맡는 역할을 오래 들여다봤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공간에서 살아가지만, 하루의 기억은 사물에 남습니다. 매일 손에 들던 그릇, 늘 같은 자리에 놓인 화병, 무심코 몸을 기대던 스툴은 생활을 담아내며 조금씩 그 집의 시간이 됩니다. 전시에서 기물은 감상의 대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작가는 “기물은 만든 사람에 의해 형태를 갖추지만, 결국 쓰는 사람의 환경과 애착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형태는 가마에서 완성됩니다. 공예는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누군가의 식탁에 오르고, 꽃을 꽂아두고, 손때가 배어가며 생활의 일부가 되는 과정을 지나야 작품은 비로소 자신의 시간을 갖습니다. 이혜지가 말하는 공예는 만드는 기술보다 살아가는 시간에 더 가깝습니다. 전시장에 놓인 기물들은 이미 형태를 갖췄지만, 앞으로 만나게 될 삶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작가가 완성한 것은 흙의 형태입니다. 그 형태를 생활로 이어가는 일은 이제 사용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 서른이 넘어 비로소 읽힌 시간 전시에서 가장 개인적인 작업은 〈낭〉입니다. 제주어로 ‘나무’를 뜻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나무를 형상화한 작업이라기보다 오랫동안 읽지 못했던 시간을 다시 마주한 기록입니다. 출발점은 어린 시절 읽었던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습니다. 당시 작가는 “나도 저 나무처럼 되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독후감을 썼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좋은 삶이라는 정도의 이해였습니다. 집을 떠나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지금, 같은 책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번에는 소년보다 나무가 먼저 보였습니다. 30년 동안 부모라는 이름으로 한자리를 지켜온 두 사람의 시간이었습니다. 자식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고도 묵묵히 일상을 견뎌온 삶이 서른을 넘어서야 비로소 읽혔습니다. 작가는 그 깨달음을 나무의 형상으로만 남기지 않았습니다. 스툴과 테이블이라는 생활의 기물로 옮겼습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오래 곁을 내어주며, 매일의 시간을 함께 견디는 사물입니다. 쓰임 속에서 완성되는 공예라는 자신의 생각도 여기 담았습니다. 〈낭〉 작업과 함께 이런 글도 남겼습니다. “두 나무의 그늘 밑에서 나는 잘 자랐고, 떨어진 열매는 늘 달콤했으며, 내어준 나뭇가지가 세상에 나아가는 법을 알려주었다.” 부모를 향한 감사만을 말하는 글은 아닙니다. 혼자 단단하게 자랐다고 믿었던 시간이 사실은 수많은 관계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뒤늦은 깨달음입니다. 이번 개인전은 그 깨달음을 흙으로 이어 쓴 기록이기도 합니다. 이런 변화는 〈낭〉뿐만 아닙니다. 전시장에 놓인 모든 기물을 관통하며 이번 개인전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냅니다. ■ 완성은 형태가 아니라 시간에 있었다 전시를 관통하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언제 작품은 완성되는가.이혜지는 그 답을 가마에서 찾지 않습니다. 형태는 그곳에서 완성되지만 공예는 그 이후부터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누군가의 집으로 들어가고, 식탁 위에 놓이고, 손에 익고, 생활을 함께 견디는 시간. 그 시간을 지나며 기물은 한 사람의 일상이 되고, 공예는 작품을 넘어 삶의 일부가 됩니다. 콘크리트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 갤러리 레미콘은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재료처럼 읽힙니다. 산업의 재료인 콘크리트와 손으로 빚은 흙이 한 공간에서 만나면서, 전시장은 기물들이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미리 비춰보는 장소가 됩니다. 그래서 《골목 가장 안쪽의 온기》는 전시를 위해 만들어진 기물들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누군가의 시간을 살아갈 사물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형태는 완성됐습니다. 이제 작품은 다른 삶을 만나러 갑니다. ■ 다섯 번째 개인전, 더 넓어진 시선 이번 개인전은 2023년 서울 제주갤러리에서 열린 제주미술대전 대상작가 초대전 이후 3년 만에 선보이는 작업입니다. 이혜지는 2022년 제48회 제주특별자치도미술대전 대상, 2021년 제주자치도 공예품대전 대상과 대한민국공예품대전 장려상을 수상했습니다. 작품은 제주현대미술관과 제주특별자치도, 양구백자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으며, 제주를 기반으로 공예와 조형의 경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초기 개인전 〈기록:器錄〉과 〈시점〉, 제주미술대전 대상작가 초대전 〈시소 see saw〉가 자신의 내면과 공간을 탐구하는 과정이었다면, 다섯 번째 개인전 《골목 가장 안쪽의 온기》는 시선이 관계와 생활로 확장된 작업입니다. 전시는 오는 28일까지 제주시 산지로 31 갤러리 레미콘 3층에서 이어집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입니다.
2026-06-25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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