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김미지의 초록이 남긴 질문
언제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전시장에 들어설 때는 초록이 먼저 보입니다. 나올 때는 한 사람이 남습니다. 제주시 연동 담소창작스튜디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Contemporary Landscape-green》입니다. 벽면을 채운 거대한 회화가 있고, 천장에서 내려온 설치 작업이 있으며, 공간 곳곳에는 숲을 닮은 장면들이 자리합니다. 처음에는 초록을 따라 걷게 됩니다. 하지만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시선은 다른 곳에 닿습니다. 오랫동안 뒤편으로 밀려나 있었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았던 한 이름. 김미지가 이번 전시에서 길러낸 것은 숲만이 아니었습니다. ■ 초록의 군락에서 생명이 솟아오르다 김미지의 회화를 처음 마주하면 익숙한 풍경화의 문법은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작품 안에는 산도 없고 바다도 없습니다. 수평선도 없습니다. 대신 화면 전체를 뒤덮은 초록의 군락이 있습니다. 식물처럼 보이다가도 세포처럼 보이고, 뿌리인 듯하다가도 혈관으로 읽힙니다. 현미경 아래 생명의 조직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어느 순간 거대한 숲의 내부를 내려다보는 기분이 듭니다. 화면 속 초록은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계속 증식하고 밀고 나오며 서로 얽혀 화면 전체를 움직입니다. 193.9×130.3㎝ 크기의 대형 회화 앞에 서면 시선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초록의 덩어리들이 서로를 밀어 올리고 끌어당기며 중심을 끊임없이 이동시키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예전의 풍경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대상이었다”며 “최근의 풍경은 내가 그 안에 들어가 하나가 되는 풍경”이라고 말합니다. 이어 “풀이 되고 꽃이 되고 작은 벌레가 되고 새가 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그리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그 말은 작품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관람객은 그림 앞에 서서 바라보기보다 그 움직임 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느 순간 나무보다 살아 있는 것들의 움직임을 먼저 만납니다. ■ 초록, 색이 아니라 버티는 힘인 것을 전시를 지배하는 건 초록입니다. 회화에도 초록이 있고 설치에도 초록이 있으며, 전시 제목에도 초록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초록은 잘 다듬어진 정원의 녹음과는 다릅니다. 뒤엉키고 번지고, 밀어내며 자랍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초록은 결코 순응하지 않습니다. 밀려나도 다시 올라오고, 가려져도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잘린 풀잎이 다시 돋아나듯, 꺾인 줄기가 다시 방향을 틀듯, 작품 속 움직임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그림 앞에 서 있으면 자연의 아름다움보다 먼저 질긴 생장력이 다가옵니다. 김미지가 그린 것은 특정한 장소가 아닙니다. 계속 자라나고 번져 나가며 스스로 영역을 넓혀가는 생명의 방식입니다. ■ 액자를 벗어난 회화, 공간 전체로 확장된 정원 이번 전시에서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지점은 회화와 설치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초록 구조물은 벽면 작품과 이어지고, 캔버스 안에서 자라던 초록은 전시장 전체로 번져 나오는 듯한 인상을 남깁니다. 관람객은 그림 앞에 멈춰 서기보다 그 사이를 걸어가게 됩니다. 작품을 감상한다기보다 공간을 경험하는 순간들입니다. 시선으로 보던 작업은 어느새 온몸으로 통과하는 감각으로 바뀝니다. 특히 자신의 물건을 수지로 떠내 연결한 ‘그린 가든’은 작가가 오랫동안 이어온 작업 세계와 맞닿아 있습니다. 화이트 가든과 블랙 가든, 무빙 화이트 가든을 거쳐 이번 전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업은 사물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공간으로 영역을 넓혀 왔습니다. 사물은 더 이상 물건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가의 손을 거치며 지나온 삶의 조각이 되고, 그 조각들은 다시 하나의 정원으로 구현됩니다. 전시장에 펼쳐진 초록의 군락은 그렇게 축적된 경험과 감각이 자라난 결과물입니다. ■ 작은 작업실에서 다시 시작된 이름 김미지는 1969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화가의 삶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혼과 육아가 먼저였습니다. 가정을 돌보는 일, 아이를 키우는 일이 일상의 중심을 차지했습니다. 점점 뒤편으로 화가라는 이름은 밀려났습니다. 그럼에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몸 하나 겨우 누울 정도의 작은 작업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작가는 자신을 농부라 말하고 정원사라 칭합니다. 씨앗을 심고, 기다리고, 돌보고, 끝내 무언가를 길러내는 사람. 직업에 대한 설명이 아닙니다. 누가 마련해 준 무대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다시 일군 세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시장에 가득한 초록 역시 그 작은 작업실에서 시작됐습니다. 오랫동안 품어온 세계가 자라나 마침내 전시장 전체를 채우게 됐습니다. ■ 길러낸 것은 숲만이 아니었다 김미지는 서울 동덕아트갤러리와 세컨드에비뉴갤러리, 대전 이공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이어오며 회화와 설치를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여 왔습니다. 2022년 담소미술창작스튜디오 우수작가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시 앞에서 이력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무엇을 만들어 왔는가입니다. 사물을 떠내고, 붙이고, 연결하며 자신만의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작은 물건에서 시작된 작업은 설치를 거쳐 공간으로 이어졌고, 이번에는 초록이 갤러리 안 곳곳으로 자라났습니다. 김미지는 이제 초록을 그립니다. 작품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숲보다 사람이 남습니다. 뒤엉킨 식물과 새, 이름 모를 군락들 사이로 한 사람의 흔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꾸 밀려났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았던 마음.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놓지 않았던 이름. 작품 속 초록은 자연을 묘사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다시 붓을 들었던 순간이 있고 작업실 불을 밝히던 밤이 있으며, 오래 접어 두었던 꿈을 다시 꺼내 든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전시장을 나서며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언제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김미지가 보여주는 것은 숲만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한쪽에 접어 두었던 자기 자신의 이름입니다. 전시는 오는 15일까지 담소창작스튜디오갤러리에서 이어집니다.
2026-06-09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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