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는 제주로는 부족했다”… 산방산 아래, 이제 사람들은 ‘소리’를 들으러 간다
제주 관광은 오랫동안 풍경과 이미지 중심의 경쟁 속에서 확장돼 왔습니다. 더 푸른 바다와 더 높은 오름, 더 화려한 야경과 더 많이 찍히는 공간들이 여행 동선을 끌어당겼습니다. 사람들은 제주에서 장면을 남기기 위해 움직였고, 관광은 점점 더 강한 시각 자원의 경쟁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행자들의 움직임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짧게 둘러보고 떠나는 장소보다, 오래 몸 안에 남는 감각을 기억하기 시작했습니다. 공기의 온도와 바람의 결, 파도가 밀려오는 리듬, 공간 안에 천천히 가라앉는 잔향과 같은 것들입니다.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에 문을 연 ‘사운드벙커 제주’는 바로 그런 변화 위에서 등장한 공간입니다. 곶자왈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현무암 해안을 두드리는 파도의 겹겹한 울림, 골목 끝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번지는 생활의 기척까지 제주의 온갖 청각 환경을 한곳에 모았습니다. 제주자치도와 제주관광공사, ㈜더사운드벙커는 지난 25일 화순리에 ‘사운드벙커 제주’를 개관했다고 26일 밝혔습니다. 이 공간은 일반적인 전시관과 분위기부터 다릅니다. 설명 문구에 앞서 낮게 깔리는 소리가 몸에 스며들고, 화면보다 공기의 밀도가 감각을 건드립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무언가를 본다기보다, 공간 안쪽으로 천천히 잠겨 들어가는 느낌을 마주하게 됩니다. ■ ‘보이지 않는 제주’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사운드벙커 제주는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Svalbard Global Seed Vault)에서 영감을 받아 조성됐습니다. 씨앗 대신 소리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제주의 자연과 마을의 소리를 기록·보관하는 ‘지구의 소리 기록소’를 콘셉트로 하고 있습니다. 곶자왈의 축축한 바람과 해안가 파도음, 마을 안쪽 생활의 호흡 같은 것들이 이 공간 안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눈앞 풍경보다 더 빨리 흩어지는 감각을 붙잡아 두겠다는 시도입니다. 2층 전시 공간에서는 산방산이 정면으로 들어옵니다. 창밖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풍경보다 공간 곳곳의 소리에 더 오래 머물면서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바람이 스치는 마찰음, 공간 안을 천천히 맴도는 기류가 감각을 길게 붙잡습니다. 무언가를 보고 지나가는 장소라기보다, 몸의 속도를 천천히 늦추게 만드는 곳입니다. 이곳을 만든 ㈜더사운드벙커는 자연·도시·사람의 소리를 수집하는 사운드스케이프 기반 스타트업입니다. 지난 2021년 제주자치도와 제주관광공사의 관광 창업기업 육성 프로그램 ‘J-스타트업’에 선정된 이후,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걷는 체험형 콘텐츠 ‘사운드워킹(Soundwalking)’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전국 지자체와 기업 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오는 6월부터는 곶자왈과 해안, 마을 현장을 직접 돌며 소리를 기록하는 필드 레코디스트 양성 프로그램도 운영할 예정입니다 제주의 감각을 듣고 기록하는 과정을 지역 안에서 함께 확장해 나가겠다는 구상입니다. ■ 제주 관광이 지금 붙잡아야 하는 건 ‘더 큰 풍경’이 아니다 최근 관광 산업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유명 장소를 짧게 훑고 지나가는 소비보다, 특정 지역의 체류 경험 자체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업계에서도 체류형 콘텐츠와 감각 기반 경험 설계는 핵심 전략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른바 인증 사진 한 장으로 끝나는 장소보다, 오래 기억되는 경험이 훨씬 강한 경쟁력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사운드벙커 제주가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제주를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청각 환경으로 다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제주 관광이 더 크고 화려한 방향으로 확장돼 왔다면, 이곳은 정반대로 움직입니다. 속도를 늦추고 소리를 낮추면서, 감각의 깊이를 오래 붙잡아 공유하려 합니다. 제주 관광은 지금, 더 많이 보여주는 경쟁보다 얼마나 깊게 남는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용원 ㈜더사운드벙커 대표는 “사운드벙커 제주는 제주의 소리와 감각, 그리고 지역의 시간을 함께 기록하는 플랫폼”이라며 “지역과 함께 성장하는 지속 가능한 콘텐츠 거점으로 만들어 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제주관광공사 관계자는 “최근 관광 트렌드가 지역의 감각과 이야기를 경험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라며 “앞으로도 지역 고유 자원을 창의적으로 해석하는 민간 주체를 발굴·육성하는 등 민간 주도의 지속 가능한 관광 생태계 육성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2026-05-26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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