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은 단단한 마음이었고, 달빛은 그 마음을 흔들어냈다” 양민희 개인전 ‘Resonance of the Moon’… 서울에서 빛을 만나다
12월의 갤러리41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색과 질감이 아니라 ‘침묵의 무게’입니다. 화면을 빽빽하게 채운 돌들은 마치 수천 번 속삭였다 지워진 문장처럼 겹겹이 남아 있고, 그 사이를 미세하게 흐르는 빛의 여백은 오래 숨겨 두었던 마음이 지나가는 통로처럼 느껴집니다. 화면 끝에서 떠오른 달 하나. 작가는 바다를 생략했습니다. 스스로도 쉽게 꺼내지 못한 감정을, 제주라는 첫 기억을 매개로 조용히 드러냈습니다. 개인전 ‘Resonance of the Moon’은 외형보다 더 안쪽에서 움직입니다. 작가가 주목한 것은 장소의 외관이 아니라, 존재에게 되돌려지는 질문의 조각들입니다. ■ 바닷돌의 표면, 내면을 끌어올리는 회화적 장치 양민희 작품에서 반복되는 형상은 제주 해안의 바위입니다. 하지만 이 돌들은 실제 지형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세계에 가깝습니다. 모델링 페이스트를 여러 번 쌓고, 갈고, 다시 올리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표면은 실존하는 바위의 윤곽을 모사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감정을 불러내기 위한 조형 언어에 가깝습니다. 작가는 돌을 감정의 상태처럼 다룹니다. 단단히 굳어 있거나, 켜켜이 눌려 있거나, 표면이 갈라져 있거나, 부서져 빛을 통과시키는 모습까지.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돌의 형태보다 그 속에 응고된 감정이 먼저 보입니다. 그 안에는 말하지 못한 마음, 오래 붙든 생각, 지나간 상처, 애써 외면한 진심까지. 우리가 스스로에게조차 숨기고 지나간 감정들이 그림 속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돌이라는 형식은 결국 ‘감정의 압력’을 가시화한 장치입니다. 시간이 쌓여 돌이 되듯, 마음속에 눌러둔 감정도 무게를 갖습니다. 작가는 그 무게를 손끝으로 긁어내고, 다시 맞서는 과정 자체를 화면에 남깁니다. 전시는 바로 그 과정의 기록입니다. ■ 달은 하나의 점이 아니라 마음의 진동을 이끄는 축 양민희의 달은 언제나 작습니다. 화면의 중심에 놓여 압도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미묘한 위치와 밝기만으로 전체 정서의 흐름을 바꿉니다. 빨강과 검정이 뒤엉킨 장면 위에 달빛이 차갑게 떠오르면, 어느새 구도는 격렬함이 아닌 정적을 띱니다. 짙은 남청의 바위들이 깊은 밤의 온도를 품을 때, 그 작은 원 하나가 어둠 속에서 간신히 흔들리는 마음의 떨림처럼 보입니다. 달은 작가가 오랫동안 바라온 마음의 불빛입니다. 회화의 주제가 아니라 감정을 비추는 렌즈이자, 화면 전체를 조율하는 미세한 울림입니다. 감정은 폭발하지 않고, 달의 인력에 이끌리듯 천천히 파문을 만듭니다. 그 과정에 마음의 자리는 조금씩 이동합니다. 이 작품에서 달은 현실을 설명하는 대상이 아니라, 가장 멀리 서서 모든 풍경의 기류를 바꾸는 중심점입니다. ■ 바위와 빛 사이의 여백, 감정이 드나드는 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바위 사이를 흐르는 빛입니다. 흰 물길처럼 보이는 여백은 단순히 빈 공간이 아니라 감정이 숨을 들이켜고 내쉬는 틈입니다. 여백이 없다면 돌은 그저 단단하게 닫힌 덩어리로 남습니다. 하지만 빛이 스며드는 순간 마음을 드나드는 통로가 생겨납니다. 상처와 상처 사이에 남겨진 숨 구멍이자, 눌린 생각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틈을 닮았습니다. 돌의 무게와 빛의 흐름이 서로를 확인하는 모습, 동양적 사유가 말해온 유(有)와 무(無)가 동시에 작동하는 조화가 이 순간 구현됩니다. 그래서 작품은 감정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여백을 따라 빛이 흐르듯, 감정도 관람객의 속도로 스며듭니다. ■ 색은 기억의 온도이자 감정의 농도 ‘Coastal Red’ 연작의 붉은 바위는 생채기와 숯빛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분노인지, 열망인지, 혹은 오래된 기억의 체온인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색은 설명보다 먼저 감각을 건드리고, 감각은 곧 기억을 불러옵니다. 반대로 ‘Coastal Blue’의 짙은 남청은 밤의 기류와도 비슷합니다. 푸른 바위는 달빛 아래 응고된 공기처럼 보이고, 흰 물길은 그 응고된 공기를 떨리게 합니다. 색은 자연을 재현하는 장치가 아니라, 감정을 농도화한 언어이자 기억의 온기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감정을 번역한 회화에 가깝습니다. ■ 표면에 남은 시간, 반복의 흔적 양민희 작품의 강한 물성은 재료 자체보다 그 재료가 견뎌온 시간이 말해줍니다. 바르고, 긁고, 말리고, 다시 쌓는 반복은 자기 감정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행위입니다. 표면을 자세히 바라보면 견고함 사이에 무수한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완성됐을 때보다, 그 과정을 버티고 지나온 손길이 더 먼저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감정이 아니라 수년 동안 스스로를 통과해온 정서적 흔적이 그 표피에 침전되어 있습니다. 바로 양민희 회화가 즉시성에 익숙한 디지털 이미지와 결을 달리하는 이유입니다. ■ 제주라는 원점, 그리고 다시 불러낸 감각 작가가 제주 출신이라는 사실은 중요한 실마리지만, 전시를 지역성으로만 읽어낼 이유는 없습니다. 바다는 특정 장소의 기록이 아니라 존재를 되묻는 기점입니다. 제주의 기억은 파문처럼 번져 화면을 흔들지만, 그것은 향토적 재현이 아니라 감각과 정서를 이루는 원류입니다. 작가는 바다를 그린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곳처럼 흘렀던 시간을 꺼냈습니다. 그래서 어느 특정 해안 풍경이 아니라, 관람객 스스로 내면에 떠오르는 어떤 순간들과 쉽게 겹쳐집니다. ■ “당신의 달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Resonance of the Moon’은 달을 묘사한 전시가 아닙니다. 달이 만들어낸 울림을 드러내는 전시입니다. 달의 크기, 위치, 온도는 작가에게 오래 말하지 못한 감정의 자리이자, 누군가를 향한 응시입니다. 작품 앞에 서면 어느 순간 그 달이 자신의 기억과 맞물립니다. 사람마다 달이 떠 있던 밤은 다릅니다. 누군가에게는 기다림이었고, 다른 이에게는 작별이었고, 또 어떤 이에게는 끝내 전하지 못한 마음이었습니다. 전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주 저음이지만, 또렷하게 묻습니다. “당신의 달은 어디에 있었나요.” 작가는 그 질문을 남기고, 관람객이 각자의 기억으로 저마다의 기억의 창고를 다시 채우도록 둡니다. 돌보다 먼저 마음이 드러나고, 달빛보다 먼저 남겨진 감정에 물들어 갑니다. 전시를 본다는 것은 작품을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 굳어 있던 돌과 그 위를 스치던 빛을 다시 불러내는 일입니다. 잔잔한 파문이 이 겨울 가장 깊은 울림으로 남습니다. 양민희 작가는 2024~2025년 가나 장흥 레지던시를 거치며 지금의 작업 방식을 더 응축시켜 왔고, 이번 ‘Resonance of the Moon’은 그 시간을 지나 삼청동에서 선보이는 아홉 번째 개인전입니다. 5일 시작한 23일까지 서울 종로구 갤러리41에서 열립니다. 평면작 15점을 공개하며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일·월 휴관)
2025-12-04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