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젖어 있던 것들은 쉽게 마르지 않는다
겉은 말라 보여도 안쪽에는 습기가 남습니다. 짠내도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천은 몸의 모양을 기억한 채 조금씩 굳어갑니다. 바다에 들어갔던 옷은 금방 마르지 않습니다. ‘2026 지역예술도약지원사업’에 선정된 제주 작가 고순철과 진주아의 작업에는 쉽게 마르지 않는 무엇이 남아 있습니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와 함께 추진하는 지역예술도약지원사업에 제주 시각예술 작가 고순철·진주아가 최종 선정됐다고 19일 밝혔습니다. 두 작가는 각각 창작·유통·홍보 연계 지원을 포함해 총 7,300만 원 규모의 지원을 받게 됩니다. 이번 선정이 눈에 남는 건 단지 지원 액수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주는 오랫동안 몇 가지 익숙한 이미지로 먼저 소비돼 왔습니다. 푸른 바다와 돌담, 해녀와 바람 같은 요소들은 어느 순간 제주를 가장 손쉽게 떠올리게 만드는 장면들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름을 올린 두 사람은 그 익숙한 방향에서 조금 비껴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소금기를 견딘 식물의 갈라진 표면을 따라가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버려진 해녀복, 닳고 닳아버린 섬유를 다시 손끝에 올려두고 있었습니다. 이 둘 모두 쉽게 지나치는 것들 가까이로 천천히 걸어 들어갑니다. 제주라는 환경이 몸 안에 무엇을 남기는지 붙들고 있습니다. ■ 식물의 표면 안에는 바람이 밀고 간 흔적이 남아 있다 서귀포를 기반으로 활동해온 고순철은 염생식물과 곶자왈, 바다 주변 생태를 꾸준히 화면 안으로 끌어들여 왔습니다. 캔버스에는 관광 엽서처럼 정리된 게 거의 없습니다. 강풍과 염분을 견딘 식물들의 표피가 가까이 남아 있습니다. 갈라지고 마른 단면, 천천히 뒤틀린 표면, 빛에 노출되며 탁해진 색들입니다. 식물을 극적으로 확대하지 않는 작업입니다. 한참 들여다봐야 겨우 드러나는 속도를 따라갑니다. 그래서 작품 앞에 서 있으면 무언가를 감상한다는 느낌보다, 마른 흙 가까이에 손을 얹고 있는 기분이 먼저 생겨납니다. 최근으로 갈수록 배경은 점점 비워지고 있습니다. 남는 건 습도와 표피, 바람이 밀고 지나간 자리입니다. 그 밀도는 쉽게 흩어지지 않아 한참 머물다 돌아 나오면, 머릿속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던 순간이 남습니다. ■ 해녀복은 버려진 뒤에도 몸의 움직임을 붙들고 있다 진주아는 폐기된 해녀복을 해체하고 다시 연결하는 설치를 통해 제주 여성들의 노동과 기억을 길어올려 왔습니다. 해녀를 상징처럼 꺼내 쓰는 방식과는 거리를 둡니다. 시선은 늘 물질에 남은 몸의 사용감으로 향합니다. 늘어난 고무의 탄성, 반복된 마찰로 얇아진 섬유, 접혔다 펴지기를 반복하며 생긴 눌린 자락들입니다. 굳이 매끈하게 복원하지 않습니다. 찢어진 부분도 그대로 남겨두고, 바랜 표면도 감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치 앞에 서 있으면 누군가 막 옷을 벗어두고 지나간 자리 같은 공기를 느끼게 됩니다. 진주아는 여성의 삶을 거창한 서사로 포장하지도 않습니다. 반복 속에 닳아버린 감정을 다시 꺼내 놓습니다. 어머니의 몸에서 시작된 기억은 해녀 공동체로 이어지고, 다시 제주 여성들의 생애 전체로 번져갑니다. 그 과정에 해녀복은 폐기물이 아니라 시간을 머금은 피부로 변해갑니다. ■ ‘지역 작가 발굴’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번 결과가 유독 눈에 박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제주를 보기 좋게 정리하는 데 크게 무게를 두지 않습니다. 자꾸 닳고 마모되면서 사라지는 것들 가까이로 움직입니다. 소금기 때문에 갈라진 식물들, 반복된 노동이 몸에 남긴 흔적, 바다를 드나든 시간이 옷에 남긴 닳은 자리들입니다. 그래서 이번 선정은 지역 예술인들이 중앙 지원사업에 이름을 올렸다는 희소식으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제주 예술이 익숙한 이미지 바깥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는 변화가 함께 보입니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보다 몸 안에 오래 남는 쪽으로 조금씩 향하고 있습니다. 크게 소리 내지 않아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천천히 스며들어 뒤늦게 몸에 남습니다. 고순철과 진주아도 지금 그 안을 지나고 있습니다. 제주문화예술재단에 따르면, 지난해 지역예술도약지원사업을 통해 문학·시각예술·공연예술 분야 8건이 선정됐습니다. 지역문화재단이 발굴한 예술인을 아르코가 후속 지원하는 사업은, 지난해부터 지역과 중앙을 연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2026-05-19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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