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는 그대로인데 삶이 이사했다… 김진아가 ‘Lv.0’에서 발견한 사람들
주소를 옮긴 적이 없는데, 어느 날 전혀 모르는 곳에서 사는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이를 낳고 돌아온 집이 그렇습니다. 가족이 아프기 시작한 뒤의 식탁도 그렇고, 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처음 맞는 평일 오전도 그렇습니다. 가구도 골목도 그대로인데, 그 안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은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김진아는 이런 사람을 ‘이주민’이라고 부릅니다. 육지에서 제주로 건너온 자신의 경험에서 시작했지만 이번 전시의 이주는 배나 비행기를 타는 이동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전까지 익숙했던 삶의 사용법이 어느 날 통하지 않고, 새로운 환경과 관계 속에서 몸과 감각을 다시 익혀야 하는 순간까지 뻗어갑니다. 몸은 제자리에 있는데 삶의 좌표가 움직입니다. 그래서 김진아 개인전 《야생의 이주민이 나타났다!?》에는 도착지가 없습니다. 대신 ‘Lv.0’이 있습니다. ■ 어디까지 가야 이주가 될까 김진아에게 이주는 밖에서 가져온 주제가 아닙니다. 육지에서 제주로 거처를 옮겼고 여러 공동체를 오갔습니다. 부모의 자식이고 한 아이의 엄마이며, 아내이자 작가로 살아왔습니다. 출산과 돌봄, 가족의 병과 의료사고, 노동과 거듭된 생활의 변화는 한 사람에게 붙은 역할의 순서를 여러 차례 뒤섞었습니다. 그러다 ‘이주민’이라는 익숙한 말이 이상해졌습니다. 어디까지 움직여야 이주가 되는지, 몇 년을 살아야 이주민이 아니게 되는지. 동네에서 동네로 옮겨도 이주인지, 제주에서 말하는 ‘육지 유학’은 또 어떤 이동인지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끝내 하나가 남았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주민은 진정 ‘장소의 이동’에 의해서만 성립하는가?” 전시는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아이를 낳으면 방은 그대로인데 집의 시간이 달라집니다. 가족이 아프면 평범했던 식탁과 침실에 돌봄의 시간이 들어옵니다. 퇴사한 사람은 같은 도시에서 어제까지 자신을 설명하던 직함 없이 하루를 시작합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전 세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주는 이런 순간에 생겨납니다. 전시 제목의 ‘야생’ 역시 숲이나 원시의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어제까지 알던 규칙은 통하지 않고 새로운 규칙은 아직 몸에 들어오지 않은 환경, 익숙했던 관계와 감각을 다시 배워야 하는 자리입니다. 거기서는 누구나 초보자가 됩니다. ■ 살아온 것은 많은데, 살아본 적 없는 하루 전시장 입구에는 게임 화면을 닮은 상태창이 떠 있습니다. ‘Lv.0’입니다. 〈Lv.0〉은 필름지와 영상, 프로젝터, 종이로 구성한 가변 설치입니다. 영상은 벽 안에만 있지 않습니다. 굴곡진 구조물을 타고 내려와 바닥으로 번지고 관객의 몸까지 화면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레벨 0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의 숫자로 읽으면 이 작품의 절반을 놓치게 됩니다. 살아온 것은 많은데, 살아본 적 없는 하루 앞에 다시 서 있는 사람의 숫자입니다. 처음 아이를 낳은 사람도, 처음 퇴직한 사람도, 처음 부모를 간병하게 된 사람도 이미 수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맞닥뜨린 하루 앞에서는 다시 초보자가 됩니다. 무엇을 갖고 있는지, 무엇을 잃었는지, 이제 무엇이 필요한지 새로 헤아려야 합니다. 김진아는 낯선 삶 앞에 선 순간을 0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공백이 아니라 재측정의 자리입니다. ■ 이력서가 버린 것들로 다시 쓰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가방을 엽니다. 〈인벤토리〉입니다. 씨앗과 작물, 낡은 작업복, 드로잉과 기록. 2002년부터 올해까지 작가를 따라온 것들이 한 공간에 놓였습니다. 보통 이력서에는 이런 물건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디에서 일했는지, 어떤 전시에 참여했는지는 적습니다. 누가 건넨 씨앗을 아직 가지고 있는지, 몇 년을 입어 몸의 모양이 밴 작업복을 왜 버리지 못했는지는 쓰지 않습니다. 이력서가 버린 것들로 한 사람의 이력을 다시 씁니다. 게임의 인벤토리를 열면 지금까지 획득한 아이템이 나옵니다. 김진아의 인벤토리에도 노동하며 익힌 손, 누군가를 돌보며 생긴 요령, 실패한 뒤에야 알게 된 것과 관계를 지나오며 몸에 남은 감각이 차곡차곡 들어 있습니다. 쓸모가 분명한 것도 있고 왜 아직 가지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삶은 대개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전시에는 지나온 시간을 다시 들춰본 두 달도 포개져 있습니다. 스튜디오126은 완성된 결과보다 창작의 과정에 무게를 두고 전국 공모로 단기 입주작가를 선정해 입주와 리서치, 제작, 전시를 잇고 있습니다. 올해는 최학윤과 김진아가 각각 상·하반기 입주작가로 선정됐고, 김진아는 7~8월 이곳에 머물며 작업했습니다. 두 달의 레지던시도 또 하나의 낯선 이주가 됐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뒤지고 가지고 온 것들을 펼쳐보는 동안 스튜디오126은 김진아가 표현한 ‘타임캡슐이자 베이스캠프’로 탈바꿈합니다.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전시장에 세우기보다 이미 살아온 시간과 몸에 남은 것들을 풀어놓았습니다. ‘숱한 버그’가 있었고 ‘체력 방전’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들고 온 것들이 있습니다. ■ 당신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인벤토리〉 앞에 서면 질문의 방향이 슬며시 바뀝니다. 처음에는 김진아의 물건을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자기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전시장에서는 관객도 자신만의 ‘생존 기술’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날 떠오른 질문을 적어도 됩니다. 그렇게 모인 기록은 전시 이후 ‘생존기술 도감’으로 다시 구성됩니다. 생존 기술이라고 해서 거창할 필요는 없습니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먼저 인사하는 방법일 수 있고, 아이를 겨우 잠들게 하는 자기만의 순서일 수도 있습니다. 실패한 다음 날 다시 출근하는 법, 관계가 끝난 뒤 혼자 밥을 먹는 법,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몸을 일으켜 현관문을 여는 요령도 여기에 들어갑니다. 자격증에는 적히지 않습니다. 경력에도 한 줄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을 다음 날까지 데려갑니다. 삶에서 가장 요긴했던 기술 가운데 상당수는 어디에서도 배웠다고 증명할 수 없습니다. 김진아는 이름조차 없던 생존 기술에 자리를 내줍니다. 개인전은 조금씩 ‘개인’에게서 멀어집니다. 작가의 아카이브에 관객의 시간이 스며들고, 한 사람의 생존 기록에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 보태집니다. 자기 삶에서 무언가 하나를 꺼내 놓고 가게 하는 전시입니다. ■ 꺾일 수 있어서 움직인다 전시장 안쪽에서는 물건보다 소리가 먼저 다가옵니다. 대화와 흥얼거림, 독백과 몸 안에서 나는 소리, 숲과 바다의 소리, 생활의 소음이 한 공간에서 포개집니다. 정해진 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관객은 듣다가 멈추고, 빛을 따라 걷다가 돌아섭니다. 여기에서 김진아가 오래 작업의 언어로 삼아온 ‘관절’이 등장합니다. 관절은 뼈와 뼈가 만나는 곳입니다. 붙어 있기만 해서는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꺾여야 합니다. 김진아는 가족과 개인, 노동과 돌봄, 내부와 외부, 이동과 정착 사이에서도 이런 접합부를 바라봅니다. 자식이 어느 날 부모를 돌보고, 누군가의 엄마가 다시 자신의 일을 시작합니다. 익숙한 자리에서 능숙했던 사람도 다른 관계에 들어서는 순간 서툰 사람이 됩니다. 삶의 역할은 하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음 차례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대개 여러 역할이 한꺼번에 겹치고, 때로 충돌하고 삐걱거리면서 한 몸 안에서 방향을 바꿉니다. 전시에서 ‘관절’은 신체의 부위를 넘어 삶이 움직이는 방식으로 읽힙니다. 관절이 없다면 꺾이는 순간 부러집니다. 김진아가 오래 들여다본 것은 사람이 삶의 여러 자리 사이를 어떻게 연결하고 움직여왔는지입니다. 단단히 버티는 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움직임이 관절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 잘 살아낸 사람이 아니라, 아직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쯤 되면 꽤 무거운 전시처럼 들립니다. 정작 김진아는 비장해지는 쪽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퀘스트’와 ‘버그’, ‘체력 방전’, ‘아이템’ 같은 게임의 말을 가져오고, 자신을 살아오며 모은 생존 아이템을 “남김없이 탈탈 털어 늘어놓은 보따리장수”라고 부릅니다. 엉킨 상황에서도 우스운 일은 벌어집니다. 체력이 떨어지면 멈춰 있고, 가진 것을 뒤지다가 별 쓸모없어 보였던 물건 하나를 다시 챙깁니다.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찌어찌 다음 스테이지에 도착합니다. 잘 견뎠다는 훈장도, 마침내 이겨냈다는 선언도 없습니다. 이런 태도가 전시를 삶 가까이에 붙여놓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여러 차례 처음이 됩니다. 첫 취업보다 첫 퇴사가 더 낯설 수 있습니다. 부모가 되는 일보다 늙어가는 부모를 바라보는 일이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차린 날, 오래 몸담았던 곳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오후에도 다시 초보자가 됩니다. 어제까지 능숙했던 사람도 처음 만난 삶 앞에서는 레벨 0입니다. ‘Lv.0’은 바닥을 뜻하지 않습니다. 다시 배워야 할 것이 생겼다는 표시입니다. 전시장에 들어갈 때 ‘야생의 이주민’은 김진아였습니다. 한 바퀴를 돌고 밖으로 나설 때쯤 누구를 가리키는 이름인지는 흐릿해집니다. 씨앗도 작업복도 가져오지 않은 관객에게도 저마다 살아오며 챙긴 인벤토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보여준 적도, 경력으로 인정받은 적도 없지만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들이 있습니다. 김진아는 그런 목록을 꺼내 ‘Lv.0’에 다시 올려놓습니다. 전시장을 나설 때 각자의 인벤토리도 따라 나옵니다. 낯선 하루를 몇 번이나 건너온 사람이라면, 무엇이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이미 각자의 목록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김진아 개인전 《야생의 이주민이 나타났다!?》는 오는 15일까지 제주시 북성로27 스튜디오126에서 열립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이며 일요일은 휴관입니다.
2026-09-05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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