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 빛나기 전에 버텼다
은은 반짝이기 전에 먼저 견딥니다. 두드려지고, 녹아내리고, 다시 굳는 시간을 여러 번 통과한 뒤에야 형태를 갖습니다. 금속공예가 고혜정의 작업은 그 시간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을 작품의 구조로 남깁니다. 벨기에 보고시안 재단(Boghossian Foundation)이 주관하는 ‘2025 디자인 & 공예상’(Design & Crafts Prize 2025)의 최종 수상자로 고혜정을 호명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상이 본 것은 미감이 아니라, 그 태도였습니다. 이번 수상은 ‘잘 만든 공예’를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동서양의 전통과 현대, 기술과 사유, 장식과 개념이 한 작품 안에서 실제로 대화(Dialogue)를 이루는지를 묻는 국제 공예계의 기준 앞에서, 고혜정의 은 작업이 설명 없이 통과됐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사건입니다. 자연을 닮은 형상이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방식을 구조로 번역해 온 시간의 축적이 세계의 질문을 앞질렀습니다. ■ 보고시안 재단의 기준, 장식이 아니라 대화 보고시안 재단의 심사는 단호합니다. 완성도는 기본값입니다. 결정타는 작품이 문화 간 대화를 실제로 성립시키는가입니다. 재단은 선정 사유에서 “아시아 미학의 시적 감수성에 뿌리를 둔 고혜정의 작업이 공예 전통 재료인 은(Sterling Silver)을 시대를 초월한 현대적 오브제로 확장했다”고 밝혔습니다. 심사위원 베르나르 쿨리(Bernard Coulie) 박사는 “이 재단은 예술 그 자체보다 서양과 동양, 나아가 동서남북을 잇는 화합의 도구로서의 예술을 지향한다”며 “고혜정의 작업은 그 취지를 정확히 구현한다”고 평가했습니다.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선택이었습니다. ■ 출발점은 자연, 도착지는 구조 고혜정의 작업은 자연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자연을 닮지 않습니다. 꽃과 잎을 이미지로 옮기지 않고, 형태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관찰합니다. 민들레 홀씨가 흩어질 때의 리듬, 솔잎이 겹치며 형성하는 밀도, 가지 사이에 생기는 간격이 데이터가 됩니다. 이 관찰은 곧 정리로 이어집니다. 불필요한 정보는 덜어내고, 자연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원리만 남깁니다. 자연은 대상에서 질서로, 풍경에서 구조로 전환됩니다. 이때 자연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분해하고 다시 설계해야 할 질서가 됩니다. ■ 양식화와 군집, 개체를 넘어 관계로 양식화된 개체는 접합을 통해 확장됩니다. 하나의 도안을 기준으로 크기와 길이에 미세한 차이를 주며 반복 제작하고, 주물(Casting)·땜질(Soldering)·용접(Welding)으로 연결합니다. 기술은 전면에 나오지 않습니다. 접합면은 최소화되고, 개체들은 군집을 이루며 하나의 풍경으로 작동합니다. 작품은 단일 오브제가 아니라, 여러 개체가 맺는 관계의 총합입니다. 가까이에서는 섬세하고, 멀리에서는 리듬이 읽힙니다. 감정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이미 구조 안에 흡수돼 있습니다. ■ 대표작, 언어를 증명하다 대표작 ‘단델리온 베셀(Dandelion Vessel)’은 민들레 홀씨를 소재로 삼되 외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갓털의 수를 줄이고 길이를 조정해, 확산과 증식이라는 자연의 성질을 구조로 번역합니다. 이어 연작 ‘숲: 쉼’은 솔잎의 침형을 둥근 호선으로 전환하고 미세 단위를 더해, 숲이 만들어내는 밀도와 휴지의 리듬을 시각화했습니다. 이 작업들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서 있지만 어느 쪽에도 안착하지 않습니다. 특정 대상을 지시하기보다,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을 경험하게 하는 형식입니다. 이는 자연을 재현해온 전통적 공예의 문법에서 벗어나, 자연을 하나의 ‘시스템(system)’으로 이해하려는 동시대 공예의 흐름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 은(Silver), 조용한 재료의 선택 은은 장식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지닌 금속입니다. 하지만 고혜정의 작업에서 은은 빛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광택은 절제되고, 접합의 흔적은 감춰집니다. 재료의 존재감보다 사고의 구조가 먼저 읽히도록 설계됩니다. 평단에서는 “은이 장식의 매체에서 사유의 매체로 이동한 사례”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이는 재료의 물성을 강조해온 공예의 역사 위에서, 재료를 사유의 통로로 전환하려는 최근 국제 공예계의 방향성과도 겹칩니다. 이 조용한 선택이 보고시안 재단의 기준과 정확히 맞물렸습니다. ■ 제주에서 체화된 리듬, 세계가 보편성을 읽다 고혜정은 제주 출생입니다. 바람과 간격, 반복과 축적이 일상인 환경에서 체화된 감각은 작업 전반에 스며 있습니다. 지역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대신 밀도와 리듬의 선택으로 작동합니다. 제주에서 형성된 감각은 로컬의 표식에 머물지 않고, 국제 무대에서 읽히는 보편적 구조로 확장됩니다. 자연을 ‘배경’으로 소비하던 시선을 넘어, 자연과 함께 사고하는 방식으로 이동한 결과입니다. 지역은 출신을 설명하는 정보가 아니라, 작업을 작동시키는 방법이 됩니다. ■ 축적된 이력, 국제 기준의 확인 고혜정은 2023년 청주국제공예공모전 대상 수상으로 국내 공예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2024년에는 이탈리아 미켈란젤로 재단의 국제 공예 플랫폼 호모 파베르(Homo Faber)에서 최우수 작가로 선정되는 등 지난 몇 년간 세계적 권위의 공예상을 연이어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2025년 보고시안 재단의 선택은, 그 작업이 국제적 기준에서도 지속 가능한 조형 언어로 성립했음을 확인한 결과입니다. 연속된 수상은 우연이 아니라, 전통 공예에서 동시대 공예로 이동해 온 흐름이 하나의 궤적을 완성했다는 증거입니다. ■ 작가의 말, “결과보다 과정” 고혜정은 수상 소감에서 “은이라는 재료로 자연을 단순화해 온 시간과 고민이 공감받았다는 점이 가장 뜻깊다”며 “전통과 현대의 균형 속에서 자연의 미학을 계속 탐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 말은 수상을 종착점으로 두지 않습니다. 공예가 장식의 완결이 아니라, 사유의 과정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믿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 전시로 이어지는 응답 수상작을 포함한 그의 작품은 브뤼셀의 문화예술 공간인 아르데코 건축물 빌라 앙팡(Villa Empain)에서 전시됩니다. 은으로 만든 구조들은 그 공간에서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공예는 어디까지 조용해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조용함은 얼마나 멀리 전달될 수 있는가입니다. 이번 수상은 선언이 아닙니다. 세계가 먼저 읽었고, 작업은 이미 그 자리에 와 있었으며, 우리는 이제 그 사실을 기록할 뿐입니다. 고혜정의 은은 지금도 반짝이기보다 버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이미 형태가 됐습니다.
2026-02-07
제주방송 김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