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진 자리, 넝쿨은 끝까지 번져 올랐다”… 그 끝에 남은 건 생존이었다
눈앞에 놓인 대상이 아닙니다. 이미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흐름입니다. 사람이 떠난 집으로 넝쿨이 파고듭니다. 벽을 타고 올라 창을 덮고, 지붕까지 번집니다. 멈추지 않습니다. 스스로 서지 못하는 존재가 기대고 엮이며 영역을 넓혀갑니다. 전시는 이 움직임을 붙잡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무엇이 남는가보다, 남은 것이 어떻게 버텨내는지에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5월 1일부터 노바운더리갤러리에서 열리는 김미형 개인전 ‘눈앞의 풍경’은 제주에서 출발합니다. 작업은 그 자리를 넘어 다른 질서의 영역으로 옮겨갑니다. 지역을 설명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존재가 유지되는 조건을 정면으로 겨냥합니다. ■ 스스로 서지 못하는 존재의 전략 넝쿨은 나무처럼 홀로 서지 못합니다. 다른 것에 몸을 겁니다. 감고, 기대고, 엮이며 위로 올라갑니다. 이 선택은 결핍이 아니라 필연적인 전략입니다. 김미형의 시선은 이 경로를 따라갑니다.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까지 뻗는지, 그 이동 자체를 붙잡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끝에 가깝습니다. 핵심은 그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작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뻗어나가는 절실한 생의 에너지를 담아내고 싶었다”라고 작업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이 발언은 작업의 중심축입니다. 멈추지 않으려는 힘이 축적되며 형태를 넘어 하나의 틀로 확장됩니다. 넝쿨의 선이 핏줄이나 뼈대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외형의 닮음이 아니라, 안쪽으로 파고드는 감각이 남긴 흔적입니다. 서로 기대 선 덩어리는 기도하는 몸처럼 읽히고, 얽힌 줄기는 하나의 형상으로 묶입니다. ■ 비워진 공간, 즉각적인 재점유 전시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축은 ‘집’입니다. 사람이 떠난 자리입니다. 이곳은 비어 있으면서 동시에 채워지고 있습니다. 넝쿨이 들어와 벽을 감싸고, 창을 막고, 내부까지 파고듭니다. 인간의 공간이었던 곳은 빠르게 다른 존재의 영역으로 전환됩니다. 주인이 바뀐 것이 아니라, 기준이 달라진 결과입니다. 겨울의 넝쿨에서 드러나는 선은 숨겨졌던 골격을 드러냅니다. 잎이 사라진 자리에서 보이는 것은 장식이 아니라 침투의 흔적입니다. 이 변화는 감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공간을 지배하는 원리를 드러냅니다. 비워진 자리는 오래 유지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떠난 뒤에도 넝쿨은 남아 끝까지 공간을 붙잡고 있습니다. 지키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 그 힘은 계속 이어집니다. ■ 겹쳐진 시간, 축적된 압력 이 작업은 한 시점에 고정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겹칩니다. 겨울의 마른 선과 여름의 무성함이 한 맥락 안에서 교차합니다. 계절의 대비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시간대가 한 자리에서 만납니다. 하나의 순간이 아니라, 누적된 시간이 만들어낸 밀도입니다. 관람객은 특정 시점을 보는 대신, 시간이 눌러 쌓이며 형성된 압력을 마주하게 됩니다. 과수원 창고 작업에서 이 감각은 더욱 또렷해집니다. 붉게 번진 벽면과 흘러내린 흔적은 단순히 어떤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이 스며든 자국입니다. ‘눈물’이라는 표현은 설명이 아니라, 이미 남아 있는 흔적을 따라간 언어입니다. ■ 해석되지 않는 감정의 체류 전시 후반에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다를 바라보는 한 사람입니다. 중심으로 끌어올리지 않고, 파도의 리듬 속에 놓습니다. 파도는 일어나고 부서지고 다시 밀려옵니다. 그 앞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감정은 정리되지 않고, 이야기로 묶이지 않은 채 남습니다.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 머뭅니다. ■ 결핍에서 점유로, 작업의 이동 경로 김미형의 작업은 이번 전시에서 방향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초기에는 종이에 바늘로 구멍을 내며 흔적과 결핍을 다뤘습니다. 이후 자연의 소멸 흔적을 따라가며 ‘사라진 이후’를 붙잡아 왔습니다. 넝쿨 작업은 그 흐름 위에 놓입니다. 사라진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번지며, 확장하고, 끝내 공간을 점유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감정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감깁니다. 이 작업은 그 감각이 관람객에게 스며드는 국면을 전제로 놓입니다. ■ 지역을 넘어선 ‘조건’의 문제 전시는 제주에서 시작합니다. 돌, 바람, 삼나무, 감귤밭. 하지만 작업은 그 자리를 넘어 다른 질서로 옮겨갑니다. 넝쿨은 특정한 장소에 묶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읽어내느냐입니다. 김미형의 시선은 익숙한 대상을 다른 구조로 전환합니다. 그 과정에 드러나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집요함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엮이고, 기대고, 끝내 공간을 차지하는 힘입니다. 이런 감각은 전시장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를 다른 존재가 채워가는 양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의 모습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 전시는 그 과정을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비워진 공간은 오래 비어 있지 않습니다. 전시는 그 사실을 끝까지 드러내며, 5월 30일까지 서귀포 노바운더리갤러리에서 이어집니다. 김미형 작가는 1993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뒤 금호미술관,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인사미술공간, 이상원미술관, 갤러리 담, 예술공간 이아 등에서 개인전과 주요 기획전을 선보였습니다. 신세계미술제 수상과 공공기관 우수작품 선정 등을 거쳤으며, 2021년 제주 서귀포로 작업 기반을 옮긴 이후 자연과 삶의 조건을 축으로 작업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2026-04-30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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