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눈을 마주친 고래, 꿈에서 다시 떠올랐고 김품창의 제주 25년은 다른 세계로 건너갔다
숲을 가로지르는 고래. 물속이 아니라 땅 위입니다. 여기서 시선을 떼지 못하면, 이 그림은 끝까지 낯선 채로 남습니다. 눈이 먼저 붙잡힙니다. 그다음에서야 인식이 따라옵니다. 익숙하게 세워두었던 기준이 이 지점에서 미세하게 흔들립니다. 김품창의 그림은 보이는 대상을 옮기지 않습니다. 몸을 통과한 경험이 구성의 순서를 다시 짭니다. 현실로 밀려오다가도 곧바로 백일몽처럼 미끄러지는 이미지의 압력이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우리가 서 있다고 믿어온 자리, 익숙하게 인지해온 세계의 폭이 생각보다 좁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올라옵니다. 이번 전시는 한 시기를 정리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제주에서 쌓인 시간이 어떤 밀도로 남았는지를 드러냅니다. 한 번 보고 나면, ‘풍경’이라는 말이 이전과 같은 의미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29일부터 세종뮤지움갤러리 1관에서 열리는 초대전《김품창 제주 25년: 숲과 바다, 고래를 기억하다》. 축적된 시간이 압축돼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시선이 놓여 있던 곳은 더 이상 그대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은 눈에 띄지 않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 멈춘 손을 다시 움직이게 한 바다의 순간 김품창은 2001년 서른다섯의 나이에 가족과 함께 제주 서귀포에 정착했습니다. 초기의 시간은 버티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생활이 앞섰고 그림은 밀렸습니다. 붓을 내려놓는 선택까지 이어졌습니다. 변화의 시작은 서귀포 앞바다였습니다. 수면을 밀고 솟구친 돌고래의 움직임이 멈춰 있던 감각을 건드렸습니다. 이후 고래는 그의 그림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2004년 이후 이어지며 전체 작업을 붙잡는 중심으로 자리 잡습니다. 작가는 “내 그림은 자연과 그 안의 생명, 그리고 인간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라고 밝혔습니다. 숲과 바다를 가르던 경계는 느슨해지고, 위와 아래를 나누던 기준도 함께 풀립니다. ■ 중심이 사라진 자리에서 다시 열리는 시선 김품창의 그림에는 바라보는 방향이 고정돼 있지 않습니다. 사람만 중심에 놓이지 않습니다. 나무와 숲, 바다와 생명체들이 서로를 향합니다. 처음에는 낯설지만 오래 두고 보면 기준이 달라집니다. 무엇이 중심인지 단정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림 안에서는 인간과 자연이 따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동물과 곤충, 식물과 사람이 같은 밀도로 머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편하게 시작됩니다. 하지만 끝까지 보면, 그대로 편하게 남지 않습니다. 홍가이 예술평론가는 “특정 단면을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 전체의 순환과 움직임을 담아낸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작품은 풍경을 그리는 데 머물지 않고, 풍경이 성립되는 방식을 다시 묻게 합니다. ■ 거대한 크기보다 오래 쌓인 시간이 먼저 보이는 이유 전시는 규모에서 먼저 반응을 이끕니다. 7미터와 8미터에 이르는 작업들이 공간을 채웁니다. 곶자왈 숲을 가로지르는 고래, 서귀포 바다를 한 번에 펼쳐낸 구성, 정착 초기의 거친 바다까지 이어집니다. 시선은 바깥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안쪽으로 스며듭니다. 무엇이냐는 질문보다,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는지가 먼저 작동합니다. 작업은 단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종이를 적시고 말리고, 덧입히고 지우고, 다시 올립니다. 점이 찍힙니다. 또 찍힙니다. 같은 동작이지만, 같은 결과는 없습니다. 어긋난 자리들이 겹치면서 형상이 만들어집니다. 빠르게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오래 붙잡습니다. 이 흐름은 제주에서 보낸 시간과 닮아 있습니다. 멈추고 다시 이어붙이고, 지우고 다시 얹는 시간입니다. ■ 스며들어 끝내 질문으로 남는 이미지 색은 밝습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받아들여집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결이 달라집니다. 사람을 중심에 두고 살아온 방식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자연과 떨어져 설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작가는 “자연도 우리처럼 숨 쉬고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설명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오래 남는 쪽에 가깝습니다. ■ 끊기지 않은 시간, 한 방향으로 쌓인 25년 전시는 초기부터 최근까지의 작업을 함께 묶었습니다. 시간의 간격은 보이지만 더 크게 드러나는 것은 이어짐입니다. 같은 방향을 놓지 않고 쌓아온 시간입니다. 구성은 점점 넓어졌고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반복은 그대로 쌓이지 않습니다. 눌리고 겹치며 밀도를 더합니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이 조금은 달라지길 바란다”라고 밝혔습니다. ■ 제도권이 읽어낸 자리 김품창은 1966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나 정선과 영주에서 성장했고, 추계예술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했습니다. 2001년 제주 서귀포에 정착한 이후 현재까지 제주를 기반으로 작업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포함해 20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과 서귀포예술의전당 등 주요 공간에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아트뱅크에 작품이 소장돼 있고, 초등학교 미술 교과서에도 수록됐습니다. 대한민국미술대전과 중앙미술대전 등에서 입상했고 심사위원과 제주도 문화예술위원 활동도 병행했습니다. 전시는 5월 10일까지 세종뮤지움갤러리 1관에서 진행됩니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이며 입장은 오후 6시 30분 마감됩니다. 휴관일은 없고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제주 정착 이후의 작업 40여 점이 소개되며 대형 연작도 포함됩니다. 전시 기간 작가는 현장에서 관람객을 만날 예정입니다.
2026-04-23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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