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숙성되고, 푸르게 흔들리다… 서귀포를 네 가지 색으로 다시 읽다
샤퀴테리(charcuterie)가 익어가는 공방. 향신료와 숙성의 냄새 사이로 짙은 붉음이 번지고, 낭독은 빛과 음식의 풍미를 타고 천천히 퍼집니다. 백주산보에서는 건반을 누르는 손끝과 책장을 넘기던 고요가 만납니다. 피아노 선율이 멎은 자리로 문장이 파고들고, 흑백의 여백은 미처 듣지 못했던 숨소리까지 가까이 끌어옵니다. 이중섭거리의 저녁은 푸른 재즈를 입습니다. 기타와 베이스 사이로 골목의 발걸음과 바깥 소음이 흘러들고, 보컬의 목소리는 그날의 공기와 부딪히며 매번 다른 리듬을 예고합니다. 초가을 베케에서는 시선에 앞서 바람이 몸을 건드립니다. 풀잎이 스치는 소리와 흙의 굴곡에 무용수의 속도는 달라지고, 관객도 낭독과 움직임을 보태며 정원 안의 여러 생명과 호흡을 나눕니다. 붉은 온도에서 단색의 정적을 지나 푸른 밤과 거친 초록까지. 눈과 귀에 머물던 관람은 냄새와 맛, 피부와 호흡까지 함께 쓰는 경험으로 넓어집니다. 홍민아컴퍼니가 오는 10일부터 9월 29일까지 서귀포 일대에서 선보이는 ‘4-Color Mise-en-Scène(Reading Club)’, 이른바 ‘4색 미장센’입니다. 동홍동 루스티카 제주살라미와 칠십리로 백주산보, 이중섭거리 카페메이비, 효돈 베케가 차례로 무대에 오릅니다. 문학 낭독을 중심에 두고 시각예술과 클래식 피아노, 라이브 재즈, 현대무용을 연결했습니다. 각 장소에는 크림슨 레드(Crimson Red), 그래파이트(Graphite), 딥 블루(Deep Blue), 러프 그린(Rough Green)이라는 색을 입혔습니다. 예술가와 장소, 관객이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공연은 그날 모인 사람만큼 다른 얼굴을 갖게 됩니다. ■ 네 가지 색으로 서로의 다름을 열다 미장센(Mise-en-Scène)은 연극과 영화에서 인물과 사물, 빛과 색, 움직임을 한 화면 안에 배치하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4색 미장센’에서 색은 회차를 구분하는 표식이라기보다 각 장소의 성격을 끌어내는 열쇠로 쓰입니다. 크림슨 레드는 열과 생명, 익어가는 시간을 품습니다. 연필심의 재료인 흑연을 뜻하는 그래파이트는 침묵과 사유, 글과 음악이 지나간 흔적을 드러냅니다. 딥 블루는 밤과 기억, 즉흥의 정서를 끌어안고 러프 그린은 사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정리되지 않은 생명의 속도를 따라갑니다. 붉은 설치로 문을 연 프로젝트는 흑백의 피아노와 푸른 재즈를 지나 초가을 정원의 움직임으로 마무리됩니다. 네 차례 공연은 서로 다른 형식을 취하면서도 서귀포의 늦여름과 초가을을 긴 호흡으로 이어갑니다. ■ 크림슨 레드, 붉음은 뜨거워진 시대를 식힐 수 있을까 첫 무대는 10일 오후 7시 루스티카 제주살라미에서 열립니다. 시각예술가 한희선은 샤퀴테리가 만들어지고 익어가는 공방에서 짙고 선명한 붉은색인 ‘크림슨 레드’를 통해 생명의 온도와 냉각을 다룹니다. 붉은색에는 피와 맥박, 열기와 경고의 상징이 함께 담깁니다. 한희선의 작업은 강렬한 색채로 시선을 붙든 뒤 과열된 시대의 온도를 되묻습니다. 생산과 소비의 속도는 빨라졌고 감정도 쉽게 닳아갑니다. 이곳에서 냉각은 차가움보다 회복에 가까운 말로 다가옵니다. 지나친 열을 식히고 속도를 늦추며 무뎌진 감각을 되찾는 과정입니다. 살라미는 하루 만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변화가 내부에서 천천히 진행되고, 기다림이 끝난 뒤에야 맛과 향이 달라집니다. 붉은 설치와 만난 공방의 시간은 관객을 평소와 다른 속도로 이끕니다. 눈앞에 놓인 설치는 공방의 냄새와 맛, 피부에 닿는 온도까지 관람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 그래파이트, 소리가 지나간 뒤에 남는 것 두 번째는 28일 오후 7시 백주산보에서 이어집니다. 피아니스트 최하나는 영화와 인문학 서적이 머무는 이곳에서 가곡과 쇼팽, 바흐, 모차르트의 음악을 문학 낭독과 연결합니다. 주제색은 ‘그래파이트’입니다. 흑연이 종이 위에 선과 문장을 남기듯 피아노와 낭독도 눈에 보이지 않는 흔적을 새깁니다. 연주가 끝나고 목소리가 멎은 뒤에도 그때 건드려진 생각과 감정은 관객 안에 머뭅니다. 흑백은 색을 덜어낸 자리의 작은 차이를 더 두드러지게 합니다. 건반을 누르는 힘, 문장이 끝난 뒤의 짧은 정적, 다음 음으로 건너가기 전의 망설임까지 한층 선명해집니다. 백주산보의 고요는 음과 음 사이를 넓히고, 그 여백에 각자의 생각이 머물 자리를 내줍니다. 음이 멎은 뒤의 침묵까지 듣게 되는 밤입니다. ■ 딥 블루, 이중섭거리의 밤에 남긴 미완의 문장 세 번째 무대는 9월 12일 오후 7시 카페메이비로 옮겨갑니다. 보컬 홍민아와 기타 조유섭, 베이스 박수현이 재즈 트리오를 이뤄 문학 낭독과 호흡을 맞춥니다. 딥 블루는 늦은 밤의 색이면서 깊이를 쉽게 헤아리기 어려운 감정의 색입니다. 재즈 연주자는 앞선 음을 기억하면서도 다음 음을 미리 고정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소리를 듣고 반응하며 그날의 음악을 만듭니다. 창밖에서 흘러든 소음과 관객의 숨소리, 순간의 흔들림도 그날 연주의 방향을 바꿉니다. 이중섭거리에는 한 예술가의 치열했던 생애와 관광지의 현재가 함께 놓여 있습니다. 예술적 낭만과 상업적 일상도 같은 골목을 오갑니다. 재즈는 그 사이를 오가며 서로 다른 기억과 현재를 한밤의 연주 안에 묶습니다. 끝을 닫지 않은 문장 하나가 거리 위에 길게 머뭅니다. ■ 러프 그린, 정원의 속도로 움직이는 몸 마지막 공연은 9월 29일 오후 4시 자연주의 정원 베케에서 열립니다. 안무가 김한결과 이나래는 정원의 생태에 반응하는 즉흥 움직임을 선보입니다. 관객도 낭독과 신체 활동에 참여합니다. 이곳의 초록에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러프’가 붙습니다. 서로 다른 식물은 제 속도를 고집하며 자라고 쇠합니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성장과 공생의 질서가 정원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바람이 세지면 몸의 속도는 달라지고, 땅의 굴곡은 이동 방향을 바꿉니다. 나뭇잎의 떨림과 빛의 변화도 무용수의 선택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의 몸은 정원을 이루는 여러 움직임 가운데 하나로 놓입니다. 전문 무용수의 숙련된 동작과 관객의 서툰 몸짓이 같은 자리에서 마주합니다. 무용수와 관객을 가르던 경계는 정원 안에서 서서히 흐려집니다. ■ 서로 다른 예술이 한곳에서 작동하는 방식 ‘4색 미장센’에는 한희선의 시각예술과 최하나의 피아노, 홍민아·조유섭·박수현의 재즈, 김한결·이나래의 무용이 참여합니다. 김호준 영상감독은 네 곳에서 벌어지는 순간을 영상으로 기록합니다. 현장에서 사라질 목소리와 움직임은 촬영과 편집을 거쳐 또 다른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프로젝트를 총괄 기획한 홍민아 대표는 “서귀포의 아름다운 일상 공간들과 지역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미장센을 통해 지역 문화예술의 자생적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라며 “단순히 감상만 하는 게 아니라 공간과 색채, 그리고 문학적 서사의 일부가 되는 몰입형 예술을 경험해볼 기회가 될 것”이라고 기획 취지를 전했습니다. 한희선의 붉은 설치는 공방의 기다림을 끌어냅니다. 최하나의 피아노는 백주산보에 쌓인 침묵을 더 깊게 만듭니다. 홍민아 트리오의 재즈는 이중섭거리의 밤과 부딪히며 매번 다른 연주를 만듭니다. 김한결과 이나래의 움직임은 바람과 식물의 속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공방의 냄새와 카페의 소음, 정원의 굴곡도 설치와 연주, 안무에 영향을 줍니다. 서로 다른 예술이 한곳에 모인 뒤 상대의 언어를 조금씩 바꿔놓습니다. ■ 공연이 끝난 뒤 마주할 서귀포의 얼굴 카페와 공방, 정원은 사람들이 먹고 쉬고 대화하며 하루를 보내는 곳입니다. 그곳에 예술이 들어오면 장소의 쓰임보다 바라보는 눈이 먼저 달라집니다. 관객은 예술가와 같은 자리에 머물며 낭독하고 듣고 움직입니다. 서로 목소리와 몸짓에 반응한 과정까지도 공연의 일부가 됩니다. 지역 예술의 자생성은 행사 횟수나 관객 규모만으로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장소를 내어주는 운영자와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는 예술가, 낯선 경험에 기꺼이 참여하는 관람객, 그 만남을 다음 작업으로 잇는 기획자가 꾸준히 호흡할 때 다음 창작의 토대도 마련됩니다. 네 차례 프로그램은 서귀포에 없던 무언가를 들여오기보다, 오래 그곳에 머물던 감각을 새삼 발견하는 자리입니다. ‘자생성’이라는 말의 무게도 행사가 끝난 뒤 확인될 몫입니다. ‘4색 미장센’은 10일 루스티카 제주살라미에서 시작해 28일 백주산보, 9월 12일 카페메이비를 거쳐 9월 29일 자연주의 정원 베케에서 마무리됩니다. 참가 신청과 자세한 안내는 홍민아컴퍼니 공식 SNS 계정(@hongmina_company)에서 확인하거나 DM 문의하면 됩니다.
2026-08-05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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