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품이 아니라 생계” 몽골 초원에서 건너온 가죽 한 조각은 어떻게 사람의 시간을 붙잡았나
초원에는 늘 바람이 먼저 지나갑니다. 사람은 그 다음입니다. 그리고 사람보다 먼저 닳는 건 길입니다. 밟히고, 씻기고, 흐트러지고, 다시 고쳐지며 길은 살아 있습니다. 그 일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곳이 ‘여행지’로 남을지 ‘삶의 자리’로 남을지는 냉정하게 갈립니다. 제주에서 시작된 올레길이 몽골까지 이어졌을 때, 물음은 하나였습니다. 이 길을 누가, 얼마나 오래 돌볼 수 있느냐였습니다. 그래서 제주올레는 가죽을 꺼냈습니다. 풍경이 아니라, 손으로 남는 것을 택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관광을 더 잘하자는 제안이 아니라, 관광이 지나간 다음을 함께 준비해보자는 선택입니다. ■ 길 위에서 생계가 자라는 방식 몽골올레는 울란바토르 인근과 테를지 국립공원 일대를 잇는 세 개의 도보 트레일입니다. 간세와 리본이 바람에 흔들리고, 표식은 햇빛에 바래고, 길은 매 계절 다른 얼굴을 드러냅니다. 이 변화는 자연스럽지만, 그냥 두면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길이란 것은 사람이 있어야 의미를 간직하고 남습니다. 그 사람을 만들기 위해 제주올레는 주민을 초대했습니다. 구경꾼으로가 아니라 운영자로 불렀습니다. 길 관리부터 체험 운영, 기념품 제작까지 손을 얹도록 설계했습니다. ‘함께걷는 몽골올레’라는 이름은 그래서 붙었습니다. ‘함께 걷는다’는 말은 ‘함께 책임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크라우드펀딩의 시작, 가죽을 선택하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지원으로 몽골 지역 주민들이 몽골올레 기념품을 직접 제작·유통할 수 있도록 기획됐습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는 뛰어난 상품보다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시작점을 찾았고, 그 답을 가죽에서 발견했습니다. 제주올레는 몽골 주민들이 만든 천연 가죽 수공예품을 리워드로 내건 크라우드 펀딩을 이달 17일부터 31일까지 오마이컴퍼니 플랫폼에서 진행하고 있다고 28일 밝혔습니다. 수익금은 몽골올레 길 유지와 주민 교육, 신규 기념품 개발 등에 쓰이며, 제품은 내년 1월 중순부터 순차 배송됩니다. 몽골에는 가죽이 많습니다. 많다는 건 쉽게 닿는다는 뜻입니다. 가축의 삶이 남긴 흔적이고, 오랫동안 다뤄온 재료이며, 큰 기계 없이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기술을 옮기기 쉽고, 실패의 비용이 크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는 문입니다. 가죽을 출발점으로 택한 이유입니다. ■ ‘펀딩’이라는 형식 프로젝트가 보조금 대신 펀딩을 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누군가 주는 돈보다, 누군가 선택하는 관계가 더 오래갑니다. 구매는 한 번으로 끝나지만, 선택은 반복됩니다. 반복되는 선택이 있어야 기술이 남고, 사람이 남고, 길이 남습니다. 이 펀딩은 요청이 아니라 제안의 형식입니다. “도와달라”가 아니라 “이걸 써달라”는 말입니다. 지역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담았습니다. ■ 그리고 ‘여기’, ‘지금’이라는 시간 전 세계 관광지는 같은 방향을 보고 있습니다. 더 멀리 갈 것인가, 더 깊이 남길 것인가. 이동은 빨라졌고, 체류는 짧아졌으며, 소비는 늘었지만 기억은 가벼워졌습니다. 이 흐름 안에서 장소가 갖는 의미는 점점 옅어집니다. 몽골올레 프로젝트는 이 옅어짐에 저항하는 시도입니다. 장소를 가볍게 쓰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길을 남기고, 손을 남기고, 시간을 남기겠다는 선택입니다. ■ 이 작지만 가볍지 않은 날들에게 가죽 키링 하나는 가볍습니다. 그 안에는 초원의 계절, 수없이 반복된 손의 연습, 햇볕과 바람을 지나온 하루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키링은 그저 들고 다니는 물건이 아니라, 어떤 관계를 손에 쥐는 방식입니다. 이 관계가 이어지면, 길은 지도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삶 속에 남습니다. 몽골의 바람은 오늘도 그 길을 스치며 닿아 또 다른 인연으로 번집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오늘도 그 길을 고칩니다. 이 펀딩은 그 손이 멈추지 않게 하는 방식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2025-12-28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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