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당시 다랑쉬굴 학살터 발굴조사 현장과 최근 다랑쉬굴 모습 © JIBS 제주방송
[기획 역사전쟁 下] 제주4·3 다랑쉬굴 학살 '덮기' 30년
4세 어린 아이까지..74년 전 다랑쉬굴에서의 참상
다랑쉬굴 학살 덮기, 희생자 두 번 죽이는 것..추모공원화해야
30년 전 오늘(4월 1일)은 제주4·3 당시 군·경 토벌대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제주도민 11구의 시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입니다.
이 일은 당시 전국적으로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여성은 물론,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까지 희생당한 4·3 민간인 학살의 전형이었습니다.
다랑쉬굴 희생자 유족인 함복순 할머니(80)에게 있어 다랑쉬굴은 가슴 찢어지는 가족의 역사가 서린 곳입니다.
함복순 할머니는 6살이 되던 해에 다랑쉬굴에서 20살의 친오빠를 잃었습니다.
아들을 찾아나섰던 함 할머니의 어머니는 '도피자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모래밭에서 총살당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행방을 추궁하는 토벌대에게 모진 구타를 당해 생사를 오가게 됩니다.
한 가족의 참혹한 이야기가 다랑쉬굴을 중심으로 얽혀 있는 것입니다.
특히, 함 할머니는 나무를 하고 고사리를 캐는 등 생계를 위해 자주 찾았던 다랑쉬 일대에 오빠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그리운 오빠를 바로 지척에 두고도 수십 년 간 그 행방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함 할머니는 "다랑쉬굴에서 발견했다고 하데요. 오빠 이름이 나왔다고. 그때 우리 오빠가 거기 있었던 걸 내가 몰랐구나(했다)."라며, "오빠 장례식에 상복을 입고 갔다. (칠성판에 놓인 유해를 보고)오빠는 나를 알아보겠지만, 나는 (희생자 중)누가 오빠인지 몰라서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거 같다"라고 한 맺힌 심정을 털어놨습니다.
또 "(오빠의)시체는 바다에 가서 뿌려서 아무것도 없다. 비석만 세웠는데 이제 위령비라도 세워지겠지 싶다. 돈(보상금) 나오는 거 반갑지 않습니다. 돈이 나오면 우리 오빠 비석이라도 잘 세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4살 어린 어린아이까지...74년 전 다랑쉬굴, 무슨 일이 있었나?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전개되면서 제주4·3 당시 학살의 광풍이 가장 거세게 몰아쳤던 시기인 1948년 12월 18일.
제주도에 주둔했던 9연대 2대대 군인과 경찰, 민간인으로 구성된 토벌대가 제주시 구좌읍에 있는 다랑쉬굴에 들이닥쳤습니다.
당시 다랑쉬굴에는 인근 마을 주민 10여 명이 피신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토벌대는 피난민들이 있는 굴에 수류탄을 투척하며 이들이 굴 밖으로 나올 것을 종용했습니다.
주민들은 굴 밖으로 나가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토벌대의 압박에 불응합니다.
그러자 토벌대는 굴 입구에서 불을 피워 사람들을 질식시켜 살해했습니다.
다랑쉬굴 안에서 희생된 사람은 종달리 주민 7명과 하도리 주민 6명 등 총 13명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다랑쉬굴 인근에서 희생된 사람까지 포함하면 희생자는 더 늘어납니다.
다랑쉬굴 희생자 가운데 2명은 희생 직후 누군가에 의해 수습되었고, 나머지 11명의 시신을 굴속에서 그대로 방치되었습니다.
희생자들의 신원은 4살과 9살 어린이와 50대 여성 1명, 20대 여성 3명을 비롯해 20~30대 남성들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놀랍게도 이 사건에는 생존자가 존재했습니다.
다랑쉬굴에 이틀 정도 피신했다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화를 면한 이 생존자는 수십 년 후 이 일에 대해 입을 열었습니다.
이를 통해 다랑쉬굴에 대한 이야기가 낱낱이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학살이 벌어진 이튿날 다랑쉬굴에 갔다는 이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굴속에는 그때까지도 토벌대가 피운 연기가 자욱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굴속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돌 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숨진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시신들의 코와 귀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고 증언 합니다.
이 생존자는 시신들을 모두 수습하진 못하고 가지런히 눕힌 채 현장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이후 희생자들의 유해는 4·3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된 엄혹한 시대상 속에서 수십 년간 굴속에서 방치되었습니다.
다랑쉬굴 학살 덮기, 희생자 두 번 죽이는 것
다랑쉬굴 학살이 자행된 지 44년이 흐른 1992년 4월 1일 자칫 역사 속에서 잊혀질 뻔했던 다랑쉬굴 학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4·3연구자와 언론인 등은 다랑쉬굴을 발견해 합동 발굴조사를 벌이고 이튿날부터 이러한 내용을 세상에 공개한 것입니다.
여론은 즉각 반응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40년 넘게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있던 유해를 양지바른 곳에 안장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러나 11구의 유해는 발굴 45일만인 1992년 5월 15일 황급히 화장돼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앞바다에 뿌려집니다.
1990년대 초반은 화장 문화가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대중의 주목을 받는 유해들이 화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것은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전개입니다.
이러한 내막에는 당시 노태우 군사정권이 유해를 화장해 바다에 뿌리기로 방침을 정했고, 하위 행정조직을 이용해 이 결정을 실현시킨 것입니다.
다랑쉬굴 학살의 진상이 전국으로 퍼져나가 정권에 부담이 되고, 민주화 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할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특히, 행정은 유족 대표들과 회의를 하는 형식을 통해 '행정에서는 유족들에게 매장을 권했으나 유족들이 화장을 원해 할 수 없이 유해를 화장했다'는 모양새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이날 유족 대표로 선정된 사람들 중에는 희생자들의 직계비속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당시 자손을 남긴 희생자는 세 명이었는데 모두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해를 양지 바른곳에 안장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결국 질식해 숨진 11구의 유해는 뼛가루가 되어서도 차가운 바닷물에 흩뿌려진 것입니다.
한편,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정보기관과 경찰 등 행정은 다랑쉬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갖은 시도를 했습니다.
행정 당국은 다랑쉬굴 희생자들은 토벌대에 발각되자 집단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는 곧 허위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말을 바꿔 다랑쉬굴이 무장대의 비밀 아지트라는 식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희생자 중에는 4살과 9살 어린이 등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희생된 청년들이 남로당이 아니라 오히려 우익 청년단인 대한청년단원임이 드러나면서 이 또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납니다.
또 정보기관은 시민사회단체와 정당, 종교계 등이 주축이 된 '다랑쉬굴 4·3희생자 대책위원회'가 유족들을 만나지 못하게 막아서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행여나 다랑쉬굴이 광주5·18 희생자들을 모신 망월동 묘역처럼 '성역화' 될 것을 우려해 굴 입구를 콘크리트로 막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다랑쉬굴 학살터, 이제라도 '추모공원화'해야
다랑쉬굴 학살은 4·3 당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자행된 학살의 전형입니다.
특히, 4·3 이후 오랜 기간 집권했던 귄위주의 정부가 과거사 관련 사건을 어떻게 억압하고 침묵시켜 왔는지에 대해서도 볼 수 있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입니다.
아울러 다랑쉬굴 공개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불씨를 살렸다가 정권의 탄압으로 잠시 주춤했었던 4·3진상 규명 운동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랑쉬굴은 공개 30년이 되는 지금까지 입구가 막힌 채 방치되고 있습니다.
4·3연구자 등 전문가들은 이러한 다랑쉬굴 인근 토지를 매입해 추모공원을 조성해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은 "다랑쉬굴을 추모공원화해서 열 한 분의 희생자를 위로해주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랑쉬굴 유적지는 지난 2005년에 보존관리계획이 수립되었으나 오랫동안 진행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왔습니다.
다랑쉬굴의 추모공원화를 위해서는 현재 이화재단(학교법인이화학당)과 개인 등이 소유한 3필지 총 20,635㎡의 토지를 매입해야 합니다.
제주자치도는 다랑쉬굴 일대 토지 매입을 위해 국비 20억 원을 신청한 상태입니다.
JIBS 제주방송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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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어린 아이까지..74년 전 다랑쉬굴에서의 참상
다랑쉬굴 학살 덮기, 희생자 두 번 죽이는 것..추모공원화해야
30년 전 오늘(4월 1일)은 제주4·3 당시 군·경 토벌대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제주도민 11구의 시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입니다.
이 일은 당시 전국적으로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여성은 물론,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까지 희생당한 4·3 민간인 학살의 전형이었습니다.
다랑쉬굴 희생자 유족인 함복순 할머니(80)에게 있어 다랑쉬굴은 가슴 찢어지는 가족의 역사가 서린 곳입니다.
함복순 할머니는 6살이 되던 해에 다랑쉬굴에서 20살의 친오빠를 잃었습니다.
아들을 찾아나섰던 함 할머니의 어머니는 '도피자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모래밭에서 총살당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행방을 추궁하는 토벌대에게 모진 구타를 당해 생사를 오가게 됩니다.
한 가족의 참혹한 이야기가 다랑쉬굴을 중심으로 얽혀 있는 것입니다.
특히, 함 할머니는 나무를 하고 고사리를 캐는 등 생계를 위해 자주 찾았던 다랑쉬 일대에 오빠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그리운 오빠를 바로 지척에 두고도 수십 년 간 그 행방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함 할머니는 "다랑쉬굴에서 발견했다고 하데요. 오빠 이름이 나왔다고. 그때 우리 오빠가 거기 있었던 걸 내가 몰랐구나(했다)."라며, "오빠 장례식에 상복을 입고 갔다. (칠성판에 놓인 유해를 보고)오빠는 나를 알아보겠지만, 나는 (희생자 중)누가 오빠인지 몰라서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거 같다"라고 한 맺힌 심정을 털어놨습니다.
또 "(오빠의)시체는 바다에 가서 뿌려서 아무것도 없다. 비석만 세웠는데 이제 위령비라도 세워지겠지 싶다. 돈(보상금) 나오는 거 반갑지 않습니다. 돈이 나오면 우리 오빠 비석이라도 잘 세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4살 어린 어린아이까지...74년 전 다랑쉬굴, 무슨 일이 있었나?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전개되면서 제주4·3 당시 학살의 광풍이 가장 거세게 몰아쳤던 시기인 1948년 12월 18일.
제주도에 주둔했던 9연대 2대대 군인과 경찰, 민간인으로 구성된 토벌대가 제주시 구좌읍에 있는 다랑쉬굴에 들이닥쳤습니다.
당시 다랑쉬굴에는 인근 마을 주민 10여 명이 피신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토벌대는 피난민들이 있는 굴에 수류탄을 투척하며 이들이 굴 밖으로 나올 것을 종용했습니다.
주민들은 굴 밖으로 나가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토벌대의 압박에 불응합니다.
그러자 토벌대는 굴 입구에서 불을 피워 사람들을 질식시켜 살해했습니다.
다랑쉬굴 안에서 희생된 사람은 종달리 주민 7명과 하도리 주민 6명 등 총 13명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다랑쉬굴 인근에서 희생된 사람까지 포함하면 희생자는 더 늘어납니다.
다랑쉬굴 희생자 가운데 2명은 희생 직후 누군가에 의해 수습되었고, 나머지 11명의 시신을 굴속에서 그대로 방치되었습니다.
희생자들의 신원은 4살과 9살 어린이와 50대 여성 1명, 20대 여성 3명을 비롯해 20~30대 남성들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놀랍게도 이 사건에는 생존자가 존재했습니다.
다랑쉬굴에 이틀 정도 피신했다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화를 면한 이 생존자는 수십 년 후 이 일에 대해 입을 열었습니다.
이를 통해 다랑쉬굴에 대한 이야기가 낱낱이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학살이 벌어진 이튿날 다랑쉬굴에 갔다는 이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굴속에는 그때까지도 토벌대가 피운 연기가 자욱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굴속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돌 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숨진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시신들의 코와 귀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고 증언 합니다.
이 생존자는 시신들을 모두 수습하진 못하고 가지런히 눕힌 채 현장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이후 희생자들의 유해는 4·3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된 엄혹한 시대상 속에서 수십 년간 굴속에서 방치되었습니다.
다랑쉬굴 학살 덮기, 희생자 두 번 죽이는 것
다랑쉬굴 학살이 자행된 지 44년이 흐른 1992년 4월 1일 자칫 역사 속에서 잊혀질 뻔했던 다랑쉬굴 학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4·3연구자와 언론인 등은 다랑쉬굴을 발견해 합동 발굴조사를 벌이고 이튿날부터 이러한 내용을 세상에 공개한 것입니다.
여론은 즉각 반응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40년 넘게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있던 유해를 양지바른 곳에 안장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러나 11구의 유해는 발굴 45일만인 1992년 5월 15일 황급히 화장돼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앞바다에 뿌려집니다.
1990년대 초반은 화장 문화가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대중의 주목을 받는 유해들이 화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것은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전개입니다.
이러한 내막에는 당시 노태우 군사정권이 유해를 화장해 바다에 뿌리기로 방침을 정했고, 하위 행정조직을 이용해 이 결정을 실현시킨 것입니다.
다랑쉬굴 학살의 진상이 전국으로 퍼져나가 정권에 부담이 되고, 민주화 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할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특히, 행정은 유족 대표들과 회의를 하는 형식을 통해 '행정에서는 유족들에게 매장을 권했으나 유족들이 화장을 원해 할 수 없이 유해를 화장했다'는 모양새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이날 유족 대표로 선정된 사람들 중에는 희생자들의 직계비속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당시 자손을 남긴 희생자는 세 명이었는데 모두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해를 양지 바른곳에 안장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결국 질식해 숨진 11구의 유해는 뼛가루가 되어서도 차가운 바닷물에 흩뿌려진 것입니다.
한편,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정보기관과 경찰 등 행정은 다랑쉬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갖은 시도를 했습니다.
행정 당국은 다랑쉬굴 희생자들은 토벌대에 발각되자 집단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는 곧 허위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말을 바꿔 다랑쉬굴이 무장대의 비밀 아지트라는 식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희생자 중에는 4살과 9살 어린이 등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희생된 청년들이 남로당이 아니라 오히려 우익 청년단인 대한청년단원임이 드러나면서 이 또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납니다.
또 정보기관은 시민사회단체와 정당, 종교계 등이 주축이 된 '다랑쉬굴 4·3희생자 대책위원회'가 유족들을 만나지 못하게 막아서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행여나 다랑쉬굴이 광주5·18 희생자들을 모신 망월동 묘역처럼 '성역화' 될 것을 우려해 굴 입구를 콘크리트로 막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다랑쉬굴 학살터, 이제라도 '추모공원화'해야
다랑쉬굴 학살은 4·3 당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자행된 학살의 전형입니다.
특히, 4·3 이후 오랜 기간 집권했던 귄위주의 정부가 과거사 관련 사건을 어떻게 억압하고 침묵시켜 왔는지에 대해서도 볼 수 있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입니다.
아울러 다랑쉬굴 공개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불씨를 살렸다가 정권의 탄압으로 잠시 주춤했었던 4·3진상 규명 운동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랑쉬굴은 공개 30년이 되는 지금까지 입구가 막힌 채 방치되고 있습니다.
4·3연구자 등 전문가들은 이러한 다랑쉬굴 인근 토지를 매입해 추모공원을 조성해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은 "다랑쉬굴을 추모공원화해서 열 한 분의 희생자를 위로해주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랑쉬굴 유적지는 지난 2005년에 보존관리계획이 수립되었으나 오랫동안 진행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왔습니다.
다랑쉬굴의 추모공원화를 위해서는 현재 이화재단(학교법인이화학당)과 개인 등이 소유한 3필지 총 20,635㎡의 토지를 매입해야 합니다.
제주자치도는 다랑쉬굴 일대 토지 매입을 위해 국비 20억 원을 신청한 상태입니다.
JIBS 제주방송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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