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지 못한 이름, 그러나 이미 이어진 길… 서명숙 이후, 제주가 서 있는 자리
이름 앞에 선뜻 ‘고(故)’를 붙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아직 그 길 위에,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명숙 이사장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누군가는 길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이 길은, 아직 끝났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 기록하던 사람, 길을 만들다 서명숙은 현장을 기록해온 인물입니다. 정치부 기자로 시작해 편집장을 맡기까지, 사건을 따라가고 맥락을 짚는 일을 이어왔습니다. 산티아고 이후,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습니다. 기록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의 움직임 자체를 바꾸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제주올레는 그 선택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미 있던 길을 다시 살리고, 끊겼던 구간을 잇는 작업이 계속됐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었습니다. 제주를 걷는다는 발상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길이 하나씩 놓이면서 사람들의 체류 시간도 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짧게 스쳐 지나가던 방문이, 발걸음을 늦추는 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 걷는다는 것, 다시 살아가는 시간 “길은 나를 살렸다.” 이 말은 개인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과로로 무너진 뒤, 산티아고에서의 시간은 멈춰 있던 삶을 다시 움직이게 만든 계기가 됐습니다. 속도를 늦춘 자리에서 하루의 리듬이 다시 맞춰졌고,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인식하는 감각도 되살아났습니다. 이 경험은 제주로 옮겨졌습니다. 제주올레는 다시 살아갈 힘을 되찾는 공간이 됐습니다. 길 위에서는 위로를 얻고, 다시 살아갈 힘을 확인하는 시간이 반복됐습니다. ■ 부딪히며 다듬어진 길 길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걷는 공간은 누군가의 생활과 맞닿은 자리였고, 낯선 사람들이 집 앞을 지나가는 상황에 대한 불편과 반발도 이어졌습니다. “왜 이 길을 지나야 하느냐”는 질문은 계속 제기됐습니다. 코스는 여러 차례 끊겼고, 방향 수정이 반복됐습니다. 우회가 거듭됐고, 설득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때론 멈춰야 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 과정을 거치며 길은 형태를 갖췄습니다. 처음부터 정해진 선이 아니라, 선택과 조정이 쌓여 만들어졌습니다. ■ 속도를 낮추자, 제주가 달라졌다 걷는 여정은 기존 여행과 다른 선택이었습니다. 빠르게 이동하고, 잠깐 보고 떠나는 관광과는 다른 결이었습니다. 속도를 낮추자 보이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이동 자체가 하나의 경험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제주는 소비하는 장소가 아니라, 시간을 보내는 공간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은 한 지점에서 끝나는 방문이 아니라, 시간이 쌓이는 경험으로 바뀌었습니다. ■ 멈춘 시기에도 사라지지 않은 길 이동이 제한됐던 시기에도, 이 길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멀리 떠날 수 없어도 걸을 수 있었고, 많이 모이지 않아도 각자 간격을 두고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하루의 일부를 떼어 길 위에 올려놓았고, 누군가는 그 길을 따라 다시 일상을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이 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환경이 바뀌어도 유지될 수 있는 이동의 방식이라는 점이 그때 드러났습니다. ■ 지금 제주, 이미 달라진 자리 제주를 찾는 모습은 이미 바뀌었습니다. 스쳐 지나던 방문은, 시간을 보내는 체류로 옮겨갔습니다. 특정 지점을 찍고 떠나는 일정이 아니라, 걷는 과정 자체를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흐름이 자리 잡았습니다. 마을 단위로 동선이 확장되고, 여행은 한 번의 방문이 아니라 반복되는 기억으로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변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이어진 선택과 시도의 축적입니다. ■ 남겨진 것은, 계속 서게 되는 이 자리 서명숙이 남긴 것은 눈에 보이는 성과가 아니라 사람들이 버틸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어떤 속도로 움직이고,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고, 어떻게 길 위에 서야 하는지를 몸으로 익히게 했습니다. 제주올레는 추모 글에서 “걷는다는 것은 다시 살아가는 일이었고, 그 길 위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라며 “당신이 만든 길 위에서 우리는 계속 걷겠다”라고 밝혔습니다. 지금도 그 길 위를 사람들은 걷고 있습니다. 서명숙은 길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끊겼던 길을 다시 불러냈고, 그 위에 발을 디디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길에서 서로를 만났고, 각자의 속도로 걸었습니다. 같은 방향을 향해 걷는 동안, 그 길은 하나의 시간이 됐습니다. 그렇게 길은 남았습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그 위에 발을 올리고 있습니다. 멈추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깁니다. 서명숙이 만든 길 위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걷고 있습니다. 장례는 서귀포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되며, 발인과 영결식은 10일 제주올레 6코스에서 이어집니다.
2026-04-09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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