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떠난 교실에서, 예술은 조용히 시간을 배운다
어떤 장소는 기능을 잃은 뒤 비로소 의미를 얻습니다. 아이들의 발걸음이 끊긴 교실은 조용해졌지만, 그 침묵은 비어 있지 않습니다. 시간이 한 번 멈췄던 자리에는 다른 종류의 흐름이 들어옵니다. 제주시 한경면 산양리의 예술곶산양은 바로 그런 공간입니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이 2026년 레지던시 6기 입주작가 공모를 시작했습니다. 이번 공모는 모집 절차에서 나아가, 창작이 어떤 조건에서 깊어지는지를 다시 묻는 제안입니다. ■ 폐교는 끝난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겹쳐지는 장소 산양리의 옛 분교는 한때 아이들의 일상으로 가득했던 곳입니다. 수업 종소리와 운동장의 먼지가 남아 있던 자리에서 이제는 다른 종류의 움직임이 이어집니다. 예술곶산양은 이 폐교를 리모델링해 조성된 창작 공간입니다. 교실은 작업실이, 복도는 우연한 대화를 만드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곳의 특징은 과도한 개입이 없다는 점입니다. 공간은 창작을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조용히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작업은 스스로 속도를 찾습니다. ■ 레지던시는 지원이 아니라 창작의 조건을 다시 설계하는 장치다 이번 공모는 시각예술 분야를 대상으로 예술가와 비평가·기획자를 포함해 총 7명을 선발합니다. 선정된 인원은 2026년 5월부터 8월 말까지 약 4개월 동안 머물며 작업을 이어갑니다. 빠른 전시 주기와 결과 중심 구조 속에서 작업은 종종 질문을 충분히 밀어붙일 기회를 잃습니다. 레지던시는 그 시간을 다시 확보하는 방식입니다. 예술곶산양은 속도를 늦추는 공간이 아니라, 사유의 깊이에 맞게 리듬을 조정하는 환경을 제안합니다. ■ 비평과 기획이 함께할 때 창작은 하나의 대화가 된다 예술곶산양은 예술가뿐 아니라 비평가와 기획자도 함께 선발합니다. 작품은 해석을 통해 살아나고, 기획을 통해 사회와 연결됩니다. 같은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시선이 교차할 때 작업은 더 넓은 맥락을 얻습니다. 창작은 고립된 행위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확장됩니다. ■ 규정이 아니라 태도로서 ‘머무름’의 구현 입주자는 매월 일정 기간 이상 상주하며 오픈스튜디오와 지역 프로그램에 참여합니다. 이런 조건을 명시한 건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장소에 머무르는 시간 자체가 작업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빛의 변화와 주변 환경은 서서히 작품 안으로 스며들고 많은 작가들은 레지던시 경험을 작업의 흐름이 달라지는 시간으로 기억합니다. ■ 창작 환경은 보이지 않는 공동 저자 선정 작가에게는 작업실과 프로그램, 창작지원금이 제공됩니다. 그러나 레지던시를 경험한 이들이 오래 기억하는 것은 지원 조건보다 공간의 감각입니다. 늦은 오후의 빛, 작업이 길어지는 밤, 우연히 이어지는 대화가 작품의 일부로 남습니다. 환경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작업의 구조를 바꿉니다. ■ 폐교,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다 접수는 27일까지 국가문화예술지원시스템을 통해 진행됩니다. 예술곶산양은 과거의 기능을 잃은 공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간을 품은 채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는 장소입니다. 아이들이 떠난 교실은 비어 있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다른 종류의 배움이 이어집니다.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배움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시 한 번 창작의 길로 나서보라고 조용히 권합니다. 그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결국 작품의 표면 위에 또렷하게 남습니다.
2026-02-16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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