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힘이 장면을 바꿀 때… 제주에서 드러난 ‘대기의 리듬’
요즘 미술관을 돌다 보면 묘하게 반복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작가들은 더 이상 무거운 개념이나 거대한 조형을 앞세우지 않고, 대신 환경이 만든 작은 변화, 몸이 감지하는 속도, 공기와 빛이 이끄는 흔들림에 오래 머뭅니다. 이 변화는 누가 주도한 흐름이 아니라, 지난 몇 년 동안 미술계가 과도한 해석과 개념 피로를 겪으며 감각과 관찰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입니다. 환경이 형태를 바꾸고, 관계가 움직임을 만들고, 작가의 의도가 아닌 조건 자체가 장면을 이끄는 방식이 올해 여러 전시에서 조용히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런 흐름 한복판에서 제주에 도착한 여다함의 개인전 ‘섭씨 22.5도 습도 20퍼센트 서풍 초속 8.7미터’는 굳이 흐름을 설명하지 않고, 그 변화가 실제로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바로 눈앞에서 보여주는 전시입니다. ■ 흔들림이 먼저 도착하는 전시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보이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흔들림입니다. 얇은 종이를 비춘 그림자는 관객의 걸음, 조명의 온기, 통로의 기류에 따라 미세하게 떨립니다. 뜨개질로 빚은 조각 ‘부럼’은 표면이 고정된 조형이 아니라 빛과 바람의 결을 따라 미묘하게 살아 움직입니다. 여다함에게 뜨개질은 손의 기술이 아니라 시간과 환경이 쌓여 지형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날의 기온, 실의 장력, 손의 감각, 작업하던 장소의 공기까지 모든 조건이 겹겹이 쌓여 표면을 이끕니다. 그래서 ‘부럼’은 ‘완성된 작품’이라기보다 여러 날의 날씨와 여러 계절의 리듬을 품은 상태의 덩어리로 서 있습니다. 전시는 그 상태를 설명하지 않고, 관람객이 직접 감각으로 읽어내도록 놓아둡니다. ■ 연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읽고’ 다시 흐른다 전시의 중심부에 놓인 설치 ‘향연’은 연기가 공간을 어떻게 기록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연기는 잠시 선을 그었다가 곧 흩어지고, 흩어진 자리에 다시 다른 선이 생깁니다. 눈으로 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연기가 흐트러지는 게 아니라, 그 순간의 공기·속도·방향을 읽고 다시 움직입니다. 여다함이 오래 지켜본 것은 연기의 선이 아니라 선을 이끄는 조건의 흐름입니다. ‘향연’은 그런 관찰을 시각적 언어로 밀어 올린 장면입니다. 흘러가는 건 연기가 아니라, 공기 속에서 태어나는 움직임의 질서입니다. ■ 풍선은 떠 있지 않아… 걸음을 옮기며 바람과 대화를 나눈다 전시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은 설치 ‘Ballroom(0&1)’에서 펼쳐집니다. 작가는 풍선에 아주 작은 무게를 달아 ‘땅 위에 서 있는 상태’를 만들어냅니다. 그 순간 풍선은 공중을 떠도는 물체가 아니라, 바닥에 발을 딛고 천천히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존재로 변합니다. 바람이 스치는 즉시 풍선은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스스로 속도와 방향을 선택합니다. 풍선을 잡고 있는 손은 그 변화를 따라가며 다시 균형을 조율합니다. 어느 쪽에도 주도권이 없습니다. 움직임은 바람에서 출발하고, 경로는 풍선이 만들며, 그 흐름을 조율하는 호흡은 사람의 감각에서 이어집니다. 전시 프로그램 ‘주먹 쥔 코끼리’는 말·빛·사운드를 더해 작품 ‘향연’을 함께 감상하는 시간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대화’ 프로그램에서는 작가·기획자·초대 대화자가 모여 전시에서 느낀 감각과 관찰을 자유롭게 나눕니다. ‘주먹 쥔 코끼리’는 전시 기간 네 차례(17일, 27일, 29일, 12월 4일) 진행되며, ‘대화’는 29일 오후 5시 30분부터 7시까지 열립니다. 작가는 이번 작업 전반을 두고 “움직임은 신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환경과 관계에서 먼저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풍선의 걸음과 바람의 방향, 손의 감각이 서로를 이끌며 만들어내는 장면이 바로 그 말을 그대로 증명합니다. ■ 왜, 지금, 이 전시가 중요할까 지난 2~3년간 미술계에서는 형태보다 ‘조건’에 주목하는 전시가 꾸준히 늘었습니다. 미술관들은 환경의 변화나 감각의 리듬을 전면에 놓은 기획을 이어왔고, 독립공간과 아티스트러너 공간에서도 신체·기류·빛·소리 같은 물리적 요소를 탐구하는 작업이 반복적으로 등장했습니다. 과도한 해석 중심의 담론에서 벗어나 관찰·감각·환경으로 돌아가려는 흐름이 현장에서 실제로 포착되고 있습니다 여다함의 작업은 그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지점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감각으로 작업을 쌓아온 결과에 가깝습니다. 전시는 개념이나 설명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그 대신 ‘감각으로 돌아가려는 미술의 긴 흐름’을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투명한 방식으로 체험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전시는 미술 담론의 요약이 아니라, 지금 미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실제 장면으로 보여주는 드문 순간입니다. ■ 작가는 바람·연기·물·수증기처럼 형태가 머무르지 않는 자연의 흐름에서 태어나는 움직임을 오래 추적해 온 시각·퍼포먼스 작가입니다. 뜨개질이라는 반복적 행위와 손의 리듬을 바람·기류·빛 같은 물리적 조건과 연결하며, 환경이 만든 변화의 속도를 작업의 중심 언어로 삼고 있습니다. 여다함(1984년생)은 아트스페이스 풀 개인전 ‘기계 액체 고체’(2019), ‘먼지 관제탑’(2011)을 비롯해 아르코미술관 ‘인투더리듬: 스코어로부터 접촉지대로’(2024), Primary Practice ‘Counting Air’(2023),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사랑을 위한 준비운동’(2021) 등 국내 주요 전시에 참여했습니다. 2017년에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CONFITE PUNO’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으며, 2021년 제주로 이주한 뒤 자연환경에서 포착한 움직임을 퍼포먼스·조형·텍스트·영상으로 다층적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번 개인전은 지난 몇 년간의 관찰과 감각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낸 사실상 첫 정점에 해당합니다. 전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다원예술창작산실의 후원으로 열렸습니다. 지난 17일 개막해 다음 달 6일까지 제주시 관덕로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에서 이어지며,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 참여와 사전 예약은 ‘빈공간’ 유선 문의 또는 작가 인스타그램(@yo_daham)을 통해 가능합니다.
2025-11-28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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