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은 돌고, 벽이 숨 쉰다… 제주가 낯선 것을 ‘제주’로 만든 시간
제주에서 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24개의 물레 위에 올라간 현무암이 돌아가고, 서로 스치는 돌의 소리는 전시장 안에서 하나의 리듬을 만듭니다. 원도심에서는 높이 6m, 폭 15m가 넘는 벽이 거대한 화면으로 바뀝니다. 오래된 극장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사라진 마을과 사람들의 기억이 들어옵니다. 제주도립미술관에서는 시간이 수백 년을 건너뜁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와 인공지능(AI)으로 만들어진 여섯 증인의 얼굴이 같은 전시 안에 놓입니다. 한쪽에는 유배가 있고 다른 쪽에는 난민과 이주가 있습니다. 현무암 옆으로 운석과 가상현실(VR)이 등장하고, 굿과 신화는 영상과 설치를 입습니다. 서로 멀어 보이는 장면을 한데 끌어모은 질문은 의외로 제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밖에서 들어온 것은 이 섬에서 어떻게 달라졌을까.” 2026 제5회 제주비엔날레 《허끄곡 모닥치곡 이야홍: 변용의 기술》이 25일 막을 올립니다. 20개국 69팀(명)의 국내외 작가가 참여해 오는 11월 15일까지 83일 동안 제주도립미술관과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 제주아트플랫폼, 예술공간 이아, 갤러리 레미콘 등 5개 공간에서 작품을 선보입니다. 올해 비엔날레가 꺼낸 세 갈래는 유배와 돌문화, 신화입니다. 제주를 완성된 하나의 이미지로 제시하는 대신 사람과 문화, 믿음과 기억이 들어오고 섞인 뒤 달라져 온 과정으로 들여다봅니다. 무엇이 제주다운가보다 ‘제주다운 것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전시에 풀어냈습니다. ■ ‘제주다움’을 원형에서 찾지 않는다 ‘허끄곡 모닥치곡’은 제주어로 ‘섞이고 모이다’라는 뜻입니다. ‘이야홍’은 제주민요 〈이야홍 타령〉의 후렴구입니다. 여기에 붙은 말이 ‘변용의 기술’입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문화가 제주에 닿은 뒤 원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낯선 것과 토착의 것이 부딪히고 뒤섞이면서 이전에 없던 모습이 생겨난 시간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 ‘섞임’은 원형의 훼손과 같은 말이 아닙니다. 카리브해의 역사와 언어를 사유했던 에두아르 글리상(Édouard Glissant)의 ‘크레올화(créolisation)’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어느 한쪽에 흡수되지 않은 채, 만남 이전에는 예상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관계와 형식을 만들어낸다는 개념입니다. 이번 비엔날레가 글리상의 이론을 직접적인 전시 방법론으로 삼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주를 고정된 원형이 아니라, 외부와의 접촉 속에서 계속 형태를 바꿔온 장소로 본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함께 읽힙니다. 유배로 들어온 사람, 대륙에서 건너온 믿음, 바다를 타고 유입된 문화는 제주에 도착한 뒤 이곳의 환경과 생활 속에서 다른 형태를 얻었습니다. 제주를 제주답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묻는 대신, ‘무엇이 제주에 와서 어떻게 제주가 됐는지’를 묻습니다. ■ 추사의 유배에서 오늘의 난민까지 첫 번째 갈래는 유배입니다. 제주도립미술관의 ‘추사의 견지에서: 유배’는 추사 김정희의 제주 유배에서 출발합니다.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섬에 갇혔던 시간이 한 예술가의 조형 언어를 어떻게 바꿨는지 따라갑니다. 1층은 추사가 인장으로 사용한 ‘불계공졸(不計工拙)’을 비롯해 ‘귤화위지(橘化爲枳)’, ‘병거사예(病居士藝)’ 세 갈래로 구성됩니다. 김정희의 〈세한도〉 영인본과 제주 문자도, 현중화의 〈취시선〉이 전시의 문을 열고 오석훈의 대형 수묵 〈한라영곡〉, 조기섭의 〈걷는 풍경: 7계〉, 이현태의 오디오비주얼 설치 〈어 김없 는 것과 어긋나는(거)〉가 이어집니다. 2층 ‘세한(歲寒): 동시대 유배’에 올라서면 유배의 뜻이 달라집니다. 조선시대의 형벌에서 난민과 흩어진 이주민 등 자신의 자리를 떠나야 했던 오늘의 사람들에게로 시야가 넓어집니다. 아슬란 고이숨과 알라아 에드리스, 윤진미, 류봉식, 정기엽의 작업이 여기에 놓입니다. 아랍에미리트 작가 알라아 에드리스는 폐허가 된 고대 유적과 신화·우화·전설을 오늘의 삶으로 불러옵니다. 〈휴전 오만 시대의 일곱 정령들〉과 〈서커스(Circus)〉 연작을 통해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달라지는 기억을 보여줍니다. 제주 작가 이쥬는 AI를 전시장으로 들였습니다. 신작 〈아포리아의 증인〉에서 관람객은 AI로 만들어진 여섯 증인의 얼굴 앞에 섭니다. 설문에 답해 나가면 마지막에 한 명의 증인과 연결됩니다. 타인의 사건을 바라보던 관람객 자신이 가해와 피해의 경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구조입니다. 수백 년 전 제주로 밀려난 추사에서 국경과 고향을 떠나는 오늘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관람객까지 이어집니다. ■ 현무암이 돌기 시작했다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로 가면 돌의 쓰임부터 달라집니다. ‘검으나 돌은 구르고 굴러: 돌문화’입니다. 현무암을 돌담과 오름으로 대표되는 제주의 상징에 묶어두지 않고 소리와 움직임, 생명과 우주의 영역까지 밀어냅니다 김현성의 신작 〈담지체〉에는 24개의 물레와 돌이 등장합니다. 관람객이 물레를 움직이면 돌이 돌면서 마찰음을 냅니다. 각각의 소리가 겹쳐지면서 공간 안에 새로운 리듬이 생깁니다. 작가는 이를 ‘24개 행성들의 새로운 질서’라고 부릅니다. 일본 작가 오카베 마사오와 사진작가 미나토 치히로는 신작 〈TIME RINGS〉로 제주와 홋카이도, 히로시마의 기억을 연결합니다. 전시장의 습기가 스스로 흔적을 만드는 갈라 포라스-김의 〈Forecasting Signal〉, 운석을 주인공으로 삼은 룸톤의 VR 작업 〈에코스피어〉, 노진아의 〈진화적 키메라-가이아〉도 만날 수 있습니다. 김정헌은 〈흙 한줌의 인과성, 우주 생명의 토양〉에서 작은 흙 한 줌을 우주 생명의 토양으로 바라봅니다. 야외 중정에는 송필의 〈실크로드, 전설(version 2)〉과 강문석의 〈초원〉이 설치됩니다. 제주의 검은 돌에서 시작했지만 이야기는 어느새 행성과 운석, 생명의 시간까지 나아갑니다. ■ 제주 신화 옆에 우크라이나의 기억이 놓이다 신화는 미술관을 빠져나와 원도심으로 향합니다. ‘큰 할망의 배꼽: 신화’가 제주아트플랫폼과 예술공간 이아, 갤러리 레미콘에서 펼쳐집니다. 제주아트플랫폼 3층 대공연장에서는 캐나다 작가 뱅상 모리세와 캐롤라인 로버트의 〈테라(TERRA)〉가 높이 6m, 폭 15m가 넘는 벽 전체를 화면으로 바꿉니다. 5층 옛 영화관에는 우크라이나 작가 자나 카디로바의 신작 〈Performance VI〉가 들어왔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사라진 마을과 잃어버린 사람들의 기억을 작업해 온 작가는 기존 퍼포먼스 연작을 제주라는 장소에 맞춰 새롭게 번안했습니다. 전쟁을 통과한 기억이 수천㎞를 건너 제주 원도심의 옛 극장에 자리 잡았습니다. 예술공간 이아에서는 제주의 녹나무를 신목이자 우주목으로 상상하는 〈날과 씨〉, 북방의 휘파람과 제주 해녀 숨비소리의 공통 기원에 주목한 김상돈의 〈거울 속 열쇠들-4개의 싹〉이 관람객을 맞습니다. 최민화는 고대 신화를 다시 그리고 곽윤주는 심방과 굿을 영상으로 기록합니다. 국가민속문화유산 〈제주도 내왓당 무신도〉 확대 복제와 ‘천지왕본풀이’에서 출발한 손유진의 〈The Between Two Suns and Two Moons〉도 전시됩니다. 신화 역시 박제하지 않습니다. 다시 그리고, 촬영하고, 다른 장소에서 건너온 기억과 섞어 현재의 언어로 옮깁니다. ■ 남방의 ‘표류’ 지나 북방으로 제4회 제주비엔날레가 ‘표류’를 통해 제주와 남방문화의 연결을 탐색했다면 이번에는 시선을 북방으로 넓혔습니다. 유배와 이주, 신화를 따라 북방문화와 제주가 이어져 온 흐름을 살핍니다. 중요한 건 문화가 어느 방향에서 들어왔느냐만은 아닙니다. 도착한 뒤 벌어진 변화입니다. 밖에서 건너온 사람과 문화가 제주에서 무엇으로 달라졌는지, 서로 다른 것이 만난 자리에 어떤 모습이 생겨났는지가 전시의 중심에 놓입니다. 그만큼 전시가 이어 붙여야 할 거리도 상당합니다. 추사와 난민, 현무암과 운석, 제주 신화와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한 비엔날레 안에 들어옵니다. 전시장도 제주도립미술관에서 돌문화공원과 원도심까지 흩어져 있습니다. 이 간격을 ‘변용’이라는 하나의 언어가 얼마나 촘촘하게 이어낼지는 83일 동안 작품과 관객이 만나면서 드러납니다. 이종후 예술감독은 “지난 비엔날레가 표류로 남방문화와의 연결을 살펴봤다면, 이번에는 유배와 신화, 돌문화를 통해 북방문화와 제주가 이어져 온 흐름을 들여다보고자 했다”며 “서로 다른 문화가 제주에서 뒤섞이고 합쳐지며 만들어낸 변용의 기술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이야기하려 한다”고 밝혔습니다. 개막식은 24일 오후 6시 관덕정 광장에서 열립니다. 홍보대사 김창옥의 인사말과 경기소리꾼 이희문의 축하공연도 예정됐습니다. 25일 추사의 글씨와 AI가 만든 얼굴, 물레 위를 도는 돌, 전쟁을 건너온 기억과 오래된 제주 신화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관람객을 기다립니다. 제주가 외부 세계와 만나며 끊임없이 달라져 왔다면, 지금 우리가 ‘제주답다’고 부르는 풍경 역시 오랜 변용 끝에 남은 한 형태일 수 있습니다. 돌은 돌고, 신화는 자리를 옮기며, 낯선 것은 제주에 닿아 또 다른 모습이 됩니다. 제5회 제주비엔날레는 그렇게 만들어진 제주를 83일 동안 다시 더듬어갑니다. 전시는 25일부터 11월 15일까지 이어집니다.
2026-08-24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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