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유목의 기억… 사라진 숲을 찾아갔다, 그 끝에 4·3의 마을이 있었다
아이가 기억하는 숲은 한낮에도 어두웠습니다. 집을 나서 나무가 우거진 길을 지나면 바다가 나왔습니다. 어른이 된 뒤 다시 찾아간 길에는 공장과 아스팔트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오래된 가로수 몇 그루를 지나 건물 사이로 바다 냄새가 밀려왔습니다. 건천을 따라 걷자 메밀꽃이 핀 밭이 나타났고, 그 길 끝에서 곤을동을 만났습니다. 제주4·3으로 사라진 마을입니다. 그곳에서 뜻밖의 풍경을 마주했습니다. 한여름의 평일인데도 산책하는 사람들과 올레길을 걷는 이들이 오갔습니다. 비극의 흔적을 찾아온 이선희는 그 모습을 보며 오래전 곤을동에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을 떠올렸습니다. 누군가는 밥을 짓고, 아이들은 마을을 뛰어다니고, 이웃들은 서로의 집을 오갔을 시간입니다. 그 상상은 제주 하늘에 새로운 마을을 그리는 작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증강현실(AR) 기기를 착용하면 가상의 풍경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고, 기기를 벗으면 사라집니다. 제주시 문화공간 양에서 열리고 있는 이선희 개인전 《켜켜이 쌓을》은 사라진 장소와 그곳에 있었던 삶을 돌아보는 전시입니다. 오름을 닮은 뿔소라 딱지, 할머니가 차리던 술상, 집보다 높이 자란 야자수,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게 된 작은 게들이 회화와 글, 영상과 AR 드로잉에 등장합니다. 제주에서 만난 사물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온 이선희의 시선은 이번 전시에서 제주4·3으로 사라진 마을에 닿습니다. 일상의 작은 발견에서 출발한 그림이 오래된 역사의 빈자리까지 향합니다. ■ 사라진 마을을 찾아간 사람, 그 이전의 삶을 생각하다 문화공간 양에 자신의 AR 작업을 소개하던 중 화북에도 제주4·3으로 사라진 마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주에 이주해 살면서도 충분히 알지 못했던 역사였습니다. 이선희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 역사를 담을 수 없다. 그러나 제주에 살면서 알아가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당시의 망설임을 표현했습니다. 그 고민을 안고 곤을동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지도를 따라 걷는 길은 낯설었습니다. 인적이 드문 밭길에 여름 햇볕이 내리쬐었습니다. 그런데 바닷가에 도착하자 산책하는 사람들과 올레길을 걷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주4·3 당시 곤을동은 불탔고 주민들이 희생됐습니다. 이선희는 그 비극이 닥치기 전 마을에도 집과 길이 있었고, 사람들이 저마다의 하루를 살았다는 사실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2026년 작품 〈사라지고 다시 찾은〉은 그 상상에서 출발했습니다. 문화공간 양의 야외 데크에서 AR 기기를 착용하면 실제 제주 하늘 위로 이선희가 그린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메타퀘스트3(Meta Quest 3)의 드로잉 프로그램 오픈브러시(Open Brush)를 활용한 작업입니다. 데크 위에는 가상의 풀들도 자랍니다. 손을 내밀면 닿을 듯하지만 촉감은 없습니다. 몸을 움직이면 그 사이를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눈으로는 보이지만 붙잡을 수 없는 형상은 사라진 마을을 떠올리는 경험과 맞닿습니다. 작품 속 곤을동은 이선희가 현장을 찾아가 역사를 알아가면서 상상한 마을입니다. 옛 모습을 고증하는 대신 비극 이전에 그곳을 채웠을 사람들의 일상을 그렸습니다. ■ 뿔소라의 곡선에서 오름을 읽다 이선희의 작품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실마리는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선물 받은 뿔소라를 삶다가 떨어져 나온 딱지를 유심히 들여다봤습니다. 돌돌 말린 형태와 작은 돌기들이 오름의 꼭대기와 분화구를 닮았습니다. 바다에서 나온 물건에서 산의 형상을 발견한 셈입니다. 그 딱지를 모아 자석을 붙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했습니다. 누군가 건네준 뿔소라가 작은 오름이 되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졌습니다. 〈오름오름〉은 손바닥만 한 사물에서 제주의 지형을 발견한 경험을 담았습니다. 사물의 형태를 살피는 관찰이 익숙한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음식 그림에도 이런 시선이 담겼습니다. 〈돔베고기〉에는 마을 잔치에서 처음 맛본 음식의 기억이 등장합니다. 비계가 대부분인 두툼한 고기를 보고 의아해했지만, 예상과 달리 쫄깃하고 고소한 맛에 놀랐습니다. 〈자리젓〉에는 쉽게 적응하지 못했던 제주의 맛이 남아 있습니다. 자리젓에 밥 한 그릇을 먹을 수 있어야 제주 사람이 다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선희는 “힘들 것 같다”며 솔직한 반응을 남겼습니다. 서울 강남의 회식 자리에서 처음 만난 두툼한 제주 갈치, 그림을 그리면서 이름을 알게 된 황돔과 금태도 작품의 소재가 됐습니다. 이선희는 음식을 처음 마주한 순간의 낯선 감각까지 화폭에 담았습니다. 제주에 정착하며 하나씩 알아간 사물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게 됐습니다. ■ 깅이가 사라진 카페, 풍경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협재의 한 카페에는 해 질 무렵이면 작은 게들이 나타났습니다. 제주에서 '깅이'라고 부르는 게들입니다. 이선희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그곳을 찾아 거친 바다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포구 근처의 오래된 창고는 손녀가 운영하는 카페로 바뀌었습니다. 빨간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건물 앞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해가 기울 무렵이면 깅이들이 카페를 가로질러 지나갔습니다. 어디론가 돌아가는 중이었는지, 아니면 그곳이 원래 깅이들의 집이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깅이들이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손님들이 깅이를 바퀴벌레로 오해해 소독이 강화됐고, 그 뒤로 점점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깅이〉는 그 기억을 담은 작품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카페였던 공간이 작은 생명들에게는 오랫동안 살아온 터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카페를 찾는 사람들은 바다를 바라봤지만, 이선희는 바닥을 지나가던 게들의 움직임도 기억했습니다. 〈잊혀진 숲〉은 사라진 자연을 향합니다. 이선희는 2021년 비자림로 도로 확장공사 현장에서 잘려 나간 숲을 마주했던 기억을 기록했습니다. 그 모습은 고향에서 겪었던 변화와 겹쳤습니다. 떠나온 고향도 개발과 함께 크게 달라졌습니다. 논이 있던 자리에는 주택이 들어섰고, 산을 깎은 곳에는 아파트가 세워졌습니다. 가재가 살던 개천은 오염되다가 도로 아래로 사라졌습니다. 친구와 조개껍데기를 줍던 바닷가에도 아파트와 인공해변이 들어섰습니다. 제주의 훼손된 숲 앞에서 떠나온 고향의 시간이 되살아났습니다. 〈깅이〉와 〈잊혀진 숲〉에는 사람이 새롭게 만들어낸 공간과 그 변화 속에서 사라진 생명들의 자리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 할머니의 술상과 키 작은 야자수, 시간의 모양을 그리다 〈할머니의 술상〉에는 해가 저물 무렵 동네 사람들이 모이던 날들이 담겼습니다. 할머니는 술상을 차렸고, 사람들은 함께 밤을 보냈습니다. 이선희는 거로마을에서도 4·3을 겪은 주민들이 피란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집들이 온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어른이 된 손자가 돌아와 발견한 담금주에는 그 집에서 흘러간 세월과 사람들의 흔적이 겹쳐 있습니다. 술상은 한때 이웃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였습니다. 〈키 작은 앞집 야자수〉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 아이의 키와 비슷했던 야자수가 어느새 집보다 높이 자랐습니다. 그 아이도 이제는 어른이 됐습니다. 다시 찾은 집은 예전처럼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조부모의 부재가 느껴지는 공간에서 이선희는 마당의 나무들을 떠올립니다. 석류나무와 감나무, 귤나무, 앵두나무, 대추나무도 한때는 아이의 손에 닿을 만큼 작았을지 모릅니다. 어린 시절 아이와 비슷한 높이에 있던 야자수는 이제 지붕 위로 솟아 있습니다. 그 사이 조부모는 세상을 떠났고, 집을 바라보는 사람도 달라졌습니다. 작품에서 시간은 자라난 나무의 높이로 드러납니다. 한때 익숙했던 집이 낯설어진 이유도 그 사이 흘러간 세월에 있습니다. ■ 캔버스를 떠난 그림, 제주 하늘에 다시 그리다 이선희는 회화에서 출발해 영상과 설치, AR로 표현 영역을 넓혀왔습니다. 2025년 광주와 올해 서울 전시에서 여러 매체를 함께 선보였고, 지난 7월 서울 제주갤러리에서 열린 《노마디즘(Nomadism)》에서는 이동과 기억의 문제를 다뤘습니다. 이번 《켜켜이 쌓을》에서는 AR 작업이 실내를 넘어 야외까지 확장됐습니다. 캔버스에 그려진 뿔소라와 음식은 하나의 화면 안에 머뭅니다. 관람객은 그 앞에 서서 형태와 색, 작품에 담긴 사연을 살핍니다. AR 드로잉에서는 실제 공간이 화면의 일부가 됩니다. 하늘과 데크, 관람객이 서 있는 자리가 가상의 선과 형상을 받아들입니다. 관람객이 움직이면 이미지와 주변 환경이 겹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기기를 벗는 순간 디지털 드로잉은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뿔소라 딱지에서 오름을 발견했던 시선이 곤을동의 하늘에서는 오래전 마을의 일상을 상상합니다. 작은 사물의 형태를 살피던 회화적 관찰이 실제 장소 위에 이미지를 그리는 방식으로 확장됐습니다. 관람객이 글을 쓰고 AR 드로잉에 직접 참여하는 프로그램도 마련됐습니다. 작품을 바라보던 사람이 자신의 손으로 새로운 흔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 ‘기억의 장소’, 곤을동에서 다시 묻다 프랑스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Pierre Nora, 1931~2025)는 ‘기억의 장소’(lieux de mémoire)라는 개념을 통해 공동체의 기억이 특정한 장소와 사물, 상징에 응축되는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1984년부터 1992년까지 펴낸 《기억의 장소》(Les Lieux de mémoire)에서 노라는 기념물과 기록물 같은 구체적인 대상부터 의례와 상징처럼 비물질적인 요소까지 살폈습니다. 사람들이 과거를 기억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에 주목했습니다. 곤을동에는 제주4·3으로 파괴된 마을의 터가 남아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과 주민들이 겪은 비극은 오늘의 제주가 기억해야 할 역사입니다. 이선희의 AR 작업은 이 장소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방식을 제안합니다. 실제 마을의 흔적 위에 비극 이전의 일상을 상상한 이미지가 겹쳐지고, 관람객은 현재의 공간에서 과거의 삶을 생각하게 됩니다. 역사적 사실과 예술적 상상은 각자의 역할을 갖습니다. 곤을동의 역사는 기록과 증언을 통해 확인하고, 이선희의 드로잉은 그 기록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살아갔을 평범한 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노라의 개념으로 살펴보면, 작품의 의미는 디지털 기술로 마을을 그려냈다는 사실보다 그 이미지가 곤을동을 기억하는 경험에 무엇을 더하는지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사라짐의 무게도 놓여 있습니다. 카페에서 보이지 않게 된 깅이, 도로 공사로 훼손된 숲, 제주4·3으로 파괴된 마을은 각기 다른 원인과 역사를 지녔습니다. 곤을동에 이르러 이선희는 개인의 경험만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역사 앞에 섭니다. 처음 그곳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품었던 망설임은 현장을 찾아가고 역사를 알아보는 과정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시간을 거쳐 곤을동은 이선희의 작품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 기기를 벗은 뒤에도, 곤을동은 그 자리에 있다 《켜켜이 쌓을》이라는 전시명에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의미와 앞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더해가는 움직임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뿔소라 딱지는 오름을 닮았고, 키 작은 야자수는 어느새 집보다 높아졌습니다. 해 질 무렵 카페를 지나가던 깅이들은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한 사람의 유년과 다른 이에게 들은 이야기, 사라진 숲과 오래된 마을의 역사가 저마다 다른 깊이로 쌓여 있습니다. 관람객이 AR 기기를 벗으면 가상의 마을은 사라집니다. 하늘과 바다, 주변의 건물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방금 보았던 곤을동의 이미지는 더 이상 눈앞에 없지만, 그곳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이야기는 남습니다. 이선희는 “사라진 것은 곧 기억에서 잊히게 된다. 그러나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기억하려 한다”고 작품에 담은 마음을 전했습니다. 곤을동을 찾아가는 길은 지금도 열려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곳을 산책하고, 누군가는 바다를 보러 갑니다. 숲이 사라진 길 끝에서 만난 곤을동. 지금도 바다는 그 자리에 있고, 오래전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의 시간은 이선희의 그림 속에서 다시 흐릅니다. 이선희 개인전 《켜켜이 쌓을》은 오는 25일까지 제주시 문화공간 양에서 열립니다. 24일 오후 3시에는 작가와의 대화가 마련됩니다. 문화공간 양이 주최·주관하고 제주자치도와 제주문화예술재단이 후원합니다.
2026-10-21
제주방송 김지훈 (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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