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는 가위로 완성되지 않는다
가위는 조금 늦게 움직입니다. 사비나(Savina·본명 모선미) 원장은 먼저 바라봅니다. 거울 앞에 앉은 고객의 머리 위에서 두상의 곡선이 어디로 흐르는지, 머리카락이 어느 지점에서 무게를 만들고 어디에서 풀어질지를 천천히 따라갑니다. 머리모양은 아직 그대로지만 디자인은 이미 머릿속에서 완성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야 가위가 움직입니다. 사비나 원장은 “머리는 자르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세우는 일”이라며 “가위는 마지막 단계일 뿐 디자인은 그 이전에 이미 결정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철학을 정리한 책이 최근 출간됐습니다. ‘헤어컷의 비밀 from nature’입니다. ■ 형태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오랫동안 붙잡아 온 질문은 의외로 간결합니다. “형태는 어디에서 시작될까.” 현장에서 수많은 스타일을 만들어 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설명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커트는 시간이 지나도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고, 어떤 스타일은 조금만 자라도 전체 인상이 달라졌습니다. 차이는 기술이 아니라 구조에 있었습니다. 머리카락 길이가 아니라 두상 위에서 만들어지는 무게와 흐름의 균형이 디자인을 결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물음은 결국 자연을 바라보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 자연이 보여준 형태의 질서 꽃잎이 퍼지는 방식, 나뭇가지가 갈라지는 방향, 식물이 빛을 향해 몸을 틀어가는 흐름. 자연 속 형태들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일정한 질서를 공유합니다. 곡선은 확장되고 중심은 균형을 잡으며 선은 방향을 만듭니다. 어떤 형태는 무게를 아래로 모으고, 어떤 형태는 바깥으로 퍼지며 공간을 만듭니다. 구조를 따라가다 보니 머리카락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형태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카락의 길이, 두상의 곡선, 무게의 분산과 집중. 디자인은 몇 가지 기본 구조를 축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 자연에서 건축까지 이어진 관찰 형태에 대한 탐색은 자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치가 공간을 지탱하는 방식, 구조물이 균형을 유지하는 형태, 건축이 공간을 확장하는 흐름. 전혀 다른 영역처럼 보이는 건축에서도 비슷한 구조가 발견됐습니다. 곡선은 공간을 열고 중심은 균형을 잡으며 선은 흐름을 만듭니다. 서로 다른 세계의 형태들이 결국 몇 가지 구조로 수렴한다는 사실. 사비나 원장은 이 관찰을 자신만의 9개의 쉐이프(shape)로 정리했습니다. ■ 헤어 디자인의 기본 언어, 9개의 쉐이프 책의 중심에는 이 아홉 가지 쉐이프가 있습니다. 직선이 중심을 잡는 구조, 곡선이 확장되는 형태, 무게가 아래로 모이는 구조, 흐름이 바깥으로 퍼지는 형태. 자연과 건축에서 발견한 기본 구조를 헤어 디자인의 언어로 번역했습니다. 이 쉐이프들은 스타일의 이름이 아니라 머리카락의 길이와 방향, 볼륨과 균형을 설계하는 형태의 기본 언어입니다. 그래서 ‘헤어컷의 비밀’은 커트 기술서라기보다 현장에서 축적된 형태 연구를 정리한 기록에 가깝습니다. ■ 런던에서 다시 정리된 커트의 시선 사비나 원장의 이력은 국내외 현장을 오가며 이어집니다. 호텔 살롱에서 경험을 쌓은 뒤 해외 교육을 거쳐 런던 비달 사순(Vidal Sassoon) 아카데미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비달 사순은 헤어컷을 장식이 아니라 기하학적 구조와 형태로 설명한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커트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시 정리하게 됐습니다.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는 세계에서 붙잡은 것은 스타일이 아니라 형태의 원리였습니다. ■ 제주에서 이어지는 살롱의 실험 현재 사비나 원장은 제주에서 헤어 살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국내·외 관광객은 물론 지역 주민이 함께 찾는 공간에서 다양한 두상과 모발, 라이프스타일을 마주합니다. 차분한 공간에서 고객 한 사람의 얼굴형과 생활 방식까지 고려한 커트가 이뤄집니다. 이곳은 미용실이라기보다 형태 연구가 실제 디자인으로 구현되는 자신만의 작업 공간입니다. ■ K뷰티가 던지는 다음 질문 K뷰티는 오랫동안 스타일과 트렌드 중심으로 설명돼 왔습니다. 하지만 헤어 디자인의 경쟁력은 점점 구조와 디자인 언어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질감과 정교한 커트 구조는 한국 헤어 디자인이 만들어낸 중요한 미학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비나 원장은 여기에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형태를 이해하면 디자인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 쉐이프 연구의 다음 단계 앞으로 자연과 건축, 도시와 문화권을 넘나들며 ‘글로벌 쉐이프’ 연구를 이어갈 계획입니다. 세계 각 지역에서 발견되는 형태의 공통 구조를 기록해 쉐이프 연구를 시리즈로 확장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사비나 원장은 “형태는 문화가 달라도 결국 서로 닮아 있다”며 “그 공통된 구조를 찾아가는 작업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살롱 거울 앞에서 가위가 다시 움직입니다. 머리카락은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형태는 그보다 먼저 이미 두상 위에 세워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헤어컷이라는 일은 머리를 자르는 기술이 아니라, 세상 곳곳에 이미 존재하는 질서를 머리 위에서 다시 발견하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발견은 지금도 제주의 한 살롱 거울 앞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헤어컷의 비밀 from nature’ (교보문고 / 176쪽 / 커트 영상, 쉐이프별 이미지 QR코드 수록)
2026-03-14
제주방송 김지훈 (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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