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에서 나무가 돋아난다”… 곶자왈이 전한 말, 조윤득은 끝내 흙으로 받아 적었다
제주는 언제나 바람이 앞서 지나가고, 시간은 한 박자 느리게 따라오는 땅입니다. 그 느림의 지층을 오래 견뎌온 곶자왈은 말을 하지 않지만, 침묵은 늘 어떤 문장으로 변해 돌아옵니다. 조윤득은 그 말들을 흙의 언어로 받아 적어온 작가입니다. 27일 아트인명도암갤러리에서 개막하는 개인전 ‘숲이 전하는 말’은 곶자왈이 품어온 생명의 의지와 원시적 생성의 감각을 도자조각으로 재해석해 선보입니다. 작가는 ‘제주’라는 장소성 위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생태 서사를 흙과 불, 물성과 시간으로 다시 써내려갑니다. ■ 곶자왈은 풍경이 아니라 ‘생명과 물질이 서로를 만드는 현장’ 제주의 곶자왈 숲은 언제나 무엇과 무엇의 경계가 흐립니다. 화산석은 나무를 밀어 올리고, 나무는 다시 그 돌을 감싸며 자랍니다. 돌이 나무를 낳고, 나무가 돌을 품어 키우는 이 독특한 생태는 ‘독립된 개체’라는 기존 자연관으로는 설명의 폭이 좁습니다. 작가는 바로 이 ‘상호 생성(mutual becoming)’의 감각을 흙이라는 물질로 번역합니다. 전시의 도자조형물들은 버섯처럼 솟은 형태, 균열을 따라 자란 점무늬, 생명선처럼 이어진 미세한 조각들을 통해 곶자왈의 생명력과 유기적 흐름을 시각화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연의 모습을 따라 그리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를 지켜온 방식 즉 압력, 저항, 포용, 성장을 조각적 사고로 다시 풀어낸 점입니다. ■ 흙이라는 물질, ‘기억의 매체’… 존재가 시간을 품고 다시 태어나다 도자는 뜨거운 불을 통과하며 비로소 형태를 갖습니다. 조윤득은 이 과정을 곶자왈 숲이 겪어온 생태 변화와 겹쳐 봅니다. 숲이 계절을 축적해온 것처럼, 도자 또한 열과 압력·균열과 수축을 거치며 ‘기억을 품은 물질’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래서 작품들은 오래된 생명체의 껍질 같기도, 지층의 단면 같기도, 어둠 속에서 자라난 균사를 닮기도 합니다. 표면에 남은 질감은 곶자왈이 수천 년 동안 축적해온 시간의 밀도를 담습니다. 관람객은 작품 앞에서 자연의 외형이 아니라, 자연이 살아남아온 방식을 체감하게 됩니다. ■ 인간 중심을 벗어난 감각… 스스로 생동하는 장면을 포착하다 조윤득의 조각을 앞에 두고 있으면, 돌·흙·나무가 따로 존재하는 재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선가 서로의 힘을 받아 움직이고, 다른 물질의 결을 밀어 올리며, 그 움직임에 따라 형태가 천천히 변해가는 과정이 먼저 다가옵니다. 작가에게 재료는 도구가 아닙니다. 각자의 방향성을 지닌 존재처럼 서로 얽히고 스며들며 조형을 만들어가는 관계의 장면입니다. 그래서 오브제는 어느 부분은 돌 같고, 어느 결은 나무 같지만, 둘 사이의 경계는 곧 희미해져 한 생명처럼 이어집니다. 그 흐름 속에 작품은 완결된 오브제가 되기보다, 자연이 서로를 만들어온 방식을 잠시 드러내는 순간으로 다가옵니다. ■ 자연이 건네는 말... 크지 않지만, 묵직하고 분명한 전시 공간을 지나며 관람객은 어느 순간 숲의 내부를 통과하는 기분을 느낍니다. 그곳에서 들리는 메시지는 과장되지 않은, 아주 작은 목소리입니다. “나는 이렇게 견뎠고, 너도 너의 방식으로 서 있는 거야.” “생명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 조윤득의 조각은 결국 생존의 미학을 말합니다. 부러지고 다시 이어지는 존재의 의지, 균열 속에서 틈을 찾는 생명의 방향성, 서로를 밀치면서도 결국 맞닿는 생태의 법칙. 이번 전시는 그 감각적 사유를 고스란히 건넵니다. ■ ‘흙의 기록자’ 조윤득 작가는 이화여대 미술대학원 조소학과에서 조각을 전공했습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제주라는 장소성을 중심축으로 삼으며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개인전·단체전 200여 회를 거쳐 다져온 조형 문법은 제주의 돌·흙·나무라는 물성을 토대로 생명의 서사와 존재의 시간을 탐구해온 일관된 흐름을 보여줍니다. 한국미술협회 제주도지회, 제주조각가협회, 한국여류조각가협회, 창작공동체우리에서 활동해온 궤적 역시 자연과 조각, 장소성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확장해온 맥락을 구성합니다. 조윤득의 작업은 자연이 지나온 시간을 흙이라는 원소로 받아 적는 기록의 예술입니다. 이번 전시는 그 기록의 한 문장이자,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의 시작점입니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 제주 봉개동 아트인명도암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2025-11-25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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