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기억에 어떤 빗금으로 남았을까
어떤 인연은 오래 함께했는데도 흐릿해지고, 잠깐 스쳤을 뿐인데 몇 해가 지나도록 선명한 얼굴이 있습니다. 별것 아니었던 말 한마디가 오래 남고, 잊었다고 여겼던 표정이 어느 날 불쑥 되살아납니다. 그리움과 서운함, 애정과 미움이 한 이름 안에서 뒤섞이기도 합니다. 내가 품은 기억은 더듬어볼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쪽은 타인의 기억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오래 남은 이름인지, 잠시 스쳤다가 사라진 존재인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도예가 고은지의 네 번째 개인전 《바람 사이 바람, 사람 사이 사람》은 제주에서 시작된 ‘바람’을 관계와 기억으로 이어갑니다. 전시는 오는 20일부터 27일까지 제주시 레미콘갤러리 화북에서 열립니다. ■ 비가 기울자 흙에 빗금이 생겼다 고은지에게 ‘바람’은 여러 해 이어온 작업의 화두입니다. 2022년 두 번째 개인전은 《My Wind, My Wish : 나의 바람》이었습니다. 자연에서 부는 wind와 마음에 품는 wish가 하나의 우리말 안에 놓였습니다. 이듬해 《빗금 친/여름의 면적》에서는 제주에서 몸으로 겪은 날씨가 도자의 표면으로 옮겨졌습니다. 바람 많은 섬에서 비는 곧게만 떨어지지 않습니다. 방향을 바꾸며 비스듬히 날아듭니다. 고은지는 분청사기의 박지기법을 변용해 흙의 표면을 긁고 파내며 그 움직임을 선으로 새겼습니다. 제주 화산회토와 비화산회토를 활용한 유약도 작업에 끌어들였습니다. 오름이나 바다를 그려 넣는 대신 제주에서 맞은 비의 방향은 선으로, 땅은 유약의 재료로 들어왔습니다. 이번 작품에도 그 선은 이어집니다. 길고 좁은 도판을 나란히 놓은 작품에는 가느다란 자국이 촘촘합니다. 여러 면으로 나뉜 작업에서는 빗금 사이를 굵은 선이 가로지르고, 세로로 긴 둥근 기물의 몸체에도 손이 지나간 흔적이 남았습니다. 한때 비의 방향이었던 선이 몇 해를 건너 다시 흙 위에 놓였습니다. ■ 도자는 지나간 손을 기억한다 마르기 전의 흙은 작은 힘에도 모양이 달라집니다. 누르면 들어가고 긁으면 파입니다. 손을 떼고 난 자리에는 그때 가해진 힘과 움직임이 남고, 불을 통과하면 되돌리기 어려운 자국이 됩니다. 고은지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바람의 흔적을 흙에 새기고 불로 굳혀왔습니다. 비는 이미 그쳤고 손도 떠났지만 선은 남았습니다. 빗금에는 지나간 시간이 기록됩니다. 비가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손이 어디를 지나갔는지, 어느 순간 힘이 더해졌는지를 표면이 간직합니다. 고은지는 “서로 다른 방향과 속도로 살아가며 수많은 이들과 스치고, 머물고, 멀어진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해도 각자가 느끼고 기억하는 순간은 다르다”라며 바람 역시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쥘 수도 없지만 지나간 뒤 온도와 소리, 촉감과 기억으로 흔적을 남긴다”고 표현했습니다. 이어 “자신의 곁을 지나온 바람과 지금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람을 천천히 떠올려보길 바란다”고 전시 취지를 전했습니다. 몇 해 동안 흙에 남겨온 자국이 이번에는 관계의 기억으로 이어집니다. ■ ‘나의 바람’에 타인이 들어왔다 2022년에는 《나의 바람》이었습니다. 2026년에는 《바람 사이 바람, 사람 사이 사람》입니다. 4년 사이 제목에는 ‘사이’가 생겼고, 나와 다른 존재가 등장했습니다. 제주의 바람을 감각하고 기록해온 작업에는 이번 전시에서 타인과의 관계가 더해졌습니다. 지나간 자리와 마음에 남은 기억, 저마다 품고 살아가는 작은 염원이 형태와 표면, 소리와 공간을 만납니다. 그리움이 한 줄 빗금처럼 오래 머물 때가 있고, 풀지 못한 애증은 더 깊은 자국으로 버티기도 합니다. 좋아했던 마음과 미워했던 마음이 한 이름 아래 얽히고, 잊고 싶은 장면이 도리어 또렷해지는 날도 있습니다. 고은지의 빗금 역시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습니다. 기울기가 달라지고 간격이 벌어지며 선과 선이 교차합니다. 비의 궤적에서 출발한 빗금에 서로 다른 기억의 결이 얹힙니다. ■ 타인의 기억, 타인의 빗금 자신이 품은 기억과 자신이 남긴 기억은 다릅니다. 내게 소중했던 인연이 정작 나를 희미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름조차 가물가물해진 누군가에게 나는 여전히 선명한 어느 날로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함께한 시간의 길이도 기억의 깊이를 정해주지 않습니다. 짧은 만남이 오래 남고, 긴 관계가 예상보다 빠르게 흐려지는 일도 있습니다. 관계에는 자신이 들여다볼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타인의 기억입니다. 흙에 새긴 빗금은 볼 수 있습니다. 선이 시작되고 끝난 자리, 손끝으로 파낸 깊이와 흘러간 방향도 눈앞에 드러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남긴 자국에는 그런 눈금이 없습니다. 그리움이 됐는지 애증이 됐는지, 문득 떠오르는 얼굴인지 이미 희미해진 이름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래 기억되고 싶었다고 해서 오래 남는 것도 아니고, 무심코 지나쳤다고 해서 자국까지 가벼운 것도 아닙니다. 내가 그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타인의 빗금입니다. ■ 도자와 도자 사이에 남겨둔 자리 여러 도판을 이어놓은 작업은 하나의 넓은 덩어리로 붙어 있지 않고 각각의 면 사이에 틈을 둡니다. 공중에 매달린 작품에서는 둥글고 납작한 형태들이 높낮이를 달리합니다. 서로 맞닿지 않은 도자 너머로 벽이 드러나고 그림자가 겹칩니다. 작품을 이루는 형태만큼 비워진 곳의 존재감도 선명합니다. 제목에 적힌 ‘사이’가 작품 안에서는 실제 간격으로 나타납니다. 도자는 본래 빈 곳을 품는 매체입니다. 그릇은 비어 있기에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습니다. 이번 작업에서는 여백이 기물 안쪽을 넘어 형태와 형태, 작품과 벽, 서로 다른 높이와 거리로 이어집니다. 그 빈 곳에는 각자의 경험이 놓입니다. 같은 시간을 함께 보냈어도 기억하는 장면이 다르듯 하나의 작품 앞에서 떠올리는 얼굴과 시간도 저마다 다릅니다. ■ 바람은 선이 되고, 땅은 유약이 됐다 고은지는 제주대학교에서 문화조형디자인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공예디자인을 공부했습니다. 2021년 첫 개인전 《결합器錄-수많은 결을 합하다》를 시작으로 《나의 바람》, 《빗금 친/여름의 면적》을 거쳐 이번 네 번째 개인전까지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그 궤적에서 제주는 눈에 익은 상징보다 감각과 재료로 드러납니다. 오름과 돌담, 바다를 직접 옮겨놓지 않아도 제주는 작업 안에 있습니다. 바람에 비껴 내린 비는 빗금이 됐고, 제주 토양은 유약 연구와 제작으로 이어졌습니다. 2019년에는 오창윤 제주대학교 교수와 함께 제주 화산회토와 비화산회토를 활용한 도예 유약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제주 각지의 토양이 빚어내는 서로 다른 발색과 표면을 살피고 이를 도예 작업에 적용했습니다. 제주의 날씨와 땅이 그렇게 도자 표면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자연에서 얻은 감각이 관계와 기억을 향합니다. 비의 방향을 기록했던 선에는 오래된 이름과 얼굴이 겹쳐집니다. ■ 나는 당신에게 어떤 빗금일까 몇 해를 건너온 빗금 곁에 이제 ‘사람 사이 사람’이라는 말이 놓였습니다. 흙에 새긴 빗금에는 깊이와 방향이 있습니다. 어디에서 시작해 어느 쪽으로 흘렀는지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남긴 자국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시간과 타인이 간직한 시간도 같지 않습니다. 오래 함께한 인연이 희미해지기도 하고, 스쳐간 누군가가 뜻밖에 긴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 깊이와 방향을 정작 자신은 알 수 없습니다. 고은지가 비의 방향을 따라 흙에 새겨온 선도 몇 해 사이 다른 이야기를 만나게 됐습니다. 지나간 바람을 새기던 빗금은 이제 마음속의 바람과 보이지 않는 관계까지 품었습니다. 전시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휴관일 없이 관람할 수 있습니다.
2026-09-17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