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진 제주 삼나무를 1,665일 놓지 않은 사람들… 나무의 ‘다음’을 쓰다
제주에서 삼나무는 오랫동안 다른 나무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감귤밭 가장자리에 심겨 어린 감귤나무 대신 바람을 맞았습니다. 제주에 몰아치는 거센 바람을 받아내며 자랐고, 사람들은 그 나무 뒤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세월이 흐르자 높이 자란 나무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햇빛을 가리고 농사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베어졌고, 꽃가루 문제도 따라붙었습니다. 사람이 필요해서 심었던 나무를, 필요가 줄어들자 다시 사람이 잘라냈습니다. 목재로 쓰기 어려운 작은 가지는 과수원에 남았습니다. 2022년, 그 가지를 그냥 지나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듯하고 좋은 목재를 골라낸 게 아니었습니다. 옹이가 박히고 갈라졌거나 벌레가 지나간 흔적이 있는 나무까지 가져왔습니다. 작가들은 그 흔적부터 바라봤습니다. 누군가는 그림을 그렸고 누군가는 글을 썼습니다. 사진과 영상이 더해졌고, 한 사람의 작업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나무 곁에 사람이 늘었습니다. 1,665일 동안 33명의 작가와 140명의 후원자가 함께한 기록이 첫 아트북 『나무야, 나무야, 희망 ReBorn』으로 묶였습니다. ■ 33명은 나무의 흔적부터 읽었다 책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작가가 무엇을 새로 만들었느냐보다 나무에 그대로 남겨둔 흔적입니다. 결이 보이고 옹이가 남았습니다. 갈라진 자리와 굴곡도 작품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작가들은 이미 한 생애를 지나온 나무의 모양에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마이영의 〈증조모의 집〉, 박화선의 〈고불매 보러 가는 길〉, 김민지의 〈가족이 부러운 삼나무에게, 오로라를〉, 이종철의 〈앗! 제주에 호랑이가 나타났어요〉, 박소연의 〈12년이 지나서야〉에서는 저마다 다른 삼나무의 얼굴을 만납니다. 동화작가 신이비의 〈나무는 사람을 지켜요〉와 이용환 시인의 〈제주 삼나무 이야기〉도 실렸습니다. 사진과 화보, 사람을 돌보는 이야기가 책장을 채우고, 한종수는 레바논과 히말라야 삼나무까지 시야를 넓혔습니다. 독일로 건너간 제주 삼나무와 현지 ReBorn아트의 기록도 별도의 특집으로 담았습니다. 장르도 표현법도 제각각이지만 출발점은 하나였습니다. 누군가 이미 끝났다고 판단한 나무 앞에서 33명이 다시 멈춰 섰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의 ‘ReBorn’은 조금 특별하게 읽힙니다. 작가들은 베어진 나무에 남아 있던 시간을 발견했습니다. 옹이와 나뭇결, 상처와 굴곡을 읽고 그 자리에서 각자의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 ‘쓸모가 끝났다’는 판단 뒤에 남는 것 삼나무가 걸어온 시간을 되짚으면 사람의 필요에 따라 가치가 얼마나 빠르게 달라지는지도 보입니다. 방풍림으로 제 몫을 할 때는 필요한 나무였습니다. 높이 자라 헐 롤 ㄹ 포 햇빛을 가리기 시작하자 농사에 방해가 됐고, 베어진 뒤에는 버려졌습니다. 나무는 그대로인데 사람의 필요가 달라질 때마다 부르는 이름이 달라졌습니다. 리본ReBorn아트는 바로 그 변화 사이를 들여다봅니다. 한 존재가 맡았던 역할이 끝난 뒤, 그 존재가 살아온 시간은 어디로 가는가. 잘린 삼나무에는 이미 시간이 지나간 자리가 있습니다. 옹이가 박혀 있고 나뭇결은 한쪽으로 휘어 있으며, 갈라진 틈과 벌레가 지나간 흔적도 있습니다. 어디에 선을 긋고 무엇을 덧댈지 정할 때마다 작가는 이미 나무에 새겨진 모양을 살피게 됩니다. 작가의 손이 나무를 바꾸지만 작업의 방향을 정하는 데는 나무가 살아온 흔적도 끼어듭니다. 미국 정치철학자 제인 베넷(Jane Bennett)은 『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에서 인간의 의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물질의 힘에 주목했습니다. 사물도 고유한 성질을 지닌 채 인간과 관계를 맺고, 그 과정에서 선택과 결과에 영향을 준다는 시선입니다. 상품으로 만들 때라면 깎아내거나 피해갈 옹이와 상처가 여기서는 작가의 선택에 관여합니다. 어디에 손을 대고 무엇을 남길지, 나무가 지닌 모양에 따라 작업도 달라집니다. 한때 사람의 필요에 따라 베어진 나무가 자신에게 남은 흔적으로 다시 사람의 손을 움직였습니다. 33명의 작업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됐습니다. ■ 작품 뒤에 있던 사람까지 책 안으로 『나무야, 나무야, 희망 ReBorn』의 책장에는 1,665일 동안 이 일을 함께한 사람들도 자리합니다. 33명의 작가 곁에는 140명의 후원자가 있었습니다. 작품에는 작가의 이름이 남지만 전시를 돕고 프로젝트를 응원한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기록에서 빠지기 쉽습니다. 한국리본ReBorn협회는 그 이름들도 책에 담았습니다. 누가 나무를 만났고 무엇을 만들었는지, 그 과정을 누가 지켜보고 힘을 보탰는지까지 기록했습니다. 제주 삼나무를 바라봐 온 언론의 기록도 있습니다. JIBS가 앞서 보도한 특집기사 〈‘다시 쓰이는 존재’로〉가 별도의 꼭지로 실렸습니다. 과수원에 버려진 나뭇가지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작가와 후원자, 글과 영상, 언론의 기록까지 불러들였습니다. 112쪽 곳곳에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동안 그 곁을 지킨 사람들의 이름과 이야기가 놓였습니다. ■ 예술이 건져 올린 뒤, 제주는 무엇을 할 것인가 책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앞으로 베어질 제주 삼나무가 보입니다. 농업 현장에는 나무를 제거해야 할 이유가 있고, 예술가는 잘린 나무에서 다른 쓰임을 발견했습니다. 그 사이에는 제주가 더 들여다볼 영역이 있습니다. 베어낸 나무를 곧바로 폐기하기 전에 상태와 크기에 따라 목공과 공예, 디자인, 예술, 교육 등에서 활용할 방법이 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제주 사람들이 필요해 심었고 수십 년 동안 바람을 막아온 나무입니다. 역할을 마친 뒤 어떻게 다룰지는 이제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넘어왔습니다. 33명의 작가는 그 가능성 하나를 먼저 보여줬습니다. 잘린 삼나무를 다시 땅에 세울 수는 없습니다. 베어진 뒤 그 나무를 어디로 보낼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 1,665일의 끝에서 다시 사람을 보다 첫 아트북 출간을 기념하는 ‘5th. 대한민국 리본ReBorn’은 오는 4일 서울 성북구 고대교우회관에서 열립니다. 작품과 영상을 통해 ‘나무와 사람들, ReBorn아트 1,665일’을 돌아보고 제주 삼나무의 수호가치를 이야기하는 포럼도 마련됩니다. 심상무 작가는 〈제주 삼나무 십자가 되다〉를 주제로 작업을 선보입니다. 장 피에르 폴로노프스키(Jean-Pierre Polonovski) 몬트리올 퀘벡대학교 겸임교수는 ‘Trees: from useful to symbolic’을 통해 나무가 실용의 영역에서 상징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짚을 예정입니다. 오수길 생태전환지원재단 이사장은 ‘나무처럼 생각하기’를, 김미옥 좋은삶성장연구소 박사는 ‘삶의 주인으로 ReBorn’을 이야기합니다. 박미영 한국리본ReBorn협회 대표는 ‘나무와 사람들, 1,665일’을 소개합니다. 1,665일 동안 달라진 것은 나무만이 아니었습니다. 제주에서 버려지는 삼나무를 바라본 사람들이 작가를 만났고, 작업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제 협회는 중년 세대가 새로운 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기업과 작가를 연결하고 문화예술가와 기업을 지원하는 쪽으로 ReBorn의 범위를 넓혀갈 계획입니다. 나무에서 시작한 ReBorn은 이제 사람을 향합니다.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의 처음에도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람을 막기 위해 삼나무를 심은 것도 사람이었고, 필요가 달라지자 베어낸 것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잘려 과수원에 남은 나무 앞에서 1,665일 전 다시 사람이 멈춰 섰습니다. 이번에는 베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을 내밀기 위해서였습니다. 33명의 작가가 그 나무를 만졌고 140명의 후원자가 곁을 지켰습니다. 그 시간이 한 권의 책으로 남았습니다. 사람을 위해 바람을 맞았던 나무에게, 사람이 다시 손을 내밀었습니다. (『나무야, 나무야, 희망 ReBorn』, 이용환·노시훈·한종수·박미영 지음, 도서출판 등, 112쪽)
2026-09-03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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