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던 풍경은 어디로 갔을까… 열두 작가가 펼친 낯선 세계
김미지의 식물들은 한 발 물러설 틈을 주지 않습니다. 녹색 잎과 줄기가 빽빽하게 얽히고, 그 사이로 분홍과 보라가 솟아오릅니다. 잎 하나를 따라가면 다른 줄기에 가로막힙니다. 어느 것이 앞에 있고 무엇이 뒤에 놓였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숲입니다. 이수진의 〈별빛 씨앗〉에서는 작은 붓질들이 모여 거대한 빛의 무리를 이룹니다. 푸른색과 보라색, 분홍과 노랑이 둥근 캔버스에 촘촘히 쌓였습니다. 가까이에서는 저마다 다른 색의 흔적이 보이고, 멀어지면 별들이 흩어진 우주처럼 다가옵니다. 한 작가는 식물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고, 다른 작가는 작은 씨앗에서 먼 우주까지 상상의 거리를 넓힙니다. 닮은 형상도, 비슷한 기법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익숙한 모습 그대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만납니다. 제주부영호텔 로비에서 열리고 있는 《닮음과 다름전》은 이처럼 서로 다른 창작의 언어를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담소창작스튜디오가 마련한 이번 작가 초대전에는 김남호·김미지·김성란·김연옥·김애란·박용운·소현경·신찬식·이수진·이지현·이해성·정형준 등 12명이 참여했습니다. 유화와 아크릴, 수묵과 채색화, 한지와 흙까지 재료와 기법도 다양합니다. 익숙한 자연과 사물에서 출발한 작품들이 저마다 다른 경험과 상상을 거쳐 새로운 형상을 얻었습니다. ■ 뒤엉킨 숲에서 발견한 삶의 질서 김미지의 〈26100101 contemporary landscape〉에는 먼 산도 수평선도 없습니다. 짙고 옅은 초록빛이 겹겹이 쌓이고 분홍과 보라, 노란색이 곳곳에서 불쑥 나타납니다. 식물의 윤곽은 구체적이지만 전체 구조는 쉽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잎과 줄기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복잡한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뒤엉킴에는 작가가 오랜 시간 마주해 온 삶의 경험이 배어 있습니다. 서양화를 전공한 김미지는 육아로 한동안 작업을 중단했다가 2015년 무렵 다시 붓을 잡았습니다. 2018년 담소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한 뒤 제주에서 작품활동을 이어왔습니다. 올해 6월 담소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Contemporary Landscape-green》에서는 곶자왈의 식생을 바탕으로 한 대형 회화와 일상용품의 형태를 활용한 설치작업을 함께 선보였습니다. 당시 작가는 자연을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보던 과거와 달리, 자신이 그 안으로 들어가 풀과 꽃, 작은 벌레와 새가 된 것처럼 그리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출품작에서도 식물들은 정돈된 정원의 질서를 따르지 않습니다. 제각기 뻗은 줄기와 서로 포개진 잎,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색채가 팽팽한 긴장을 만듭니다. 거칠고 복잡하지만 생동감은 강렬합니다. 곶자왈에서 발견한 생명의 질서가 작가의 경험을 거쳐 독자적인 회화로 발전했습니다. 김성란의 〈일출〉은 바다와 하늘, 수평선 너머의 섬을 차분하게 그려냅니다. 가까운 해안의 식생에서 먼바다까지 이어지는 구성이 공간의 깊이를 살립니다. 김애란의 〈새벽 3〉에는 짙은 청록색의 바다와 작은 배 한 척이 등장합니다. 희미한 빛이 수면에 스며들지만 어둠은 쉽게 걷히지 않습니다. 넓은 바다에 홀로 놓인 배에서 새벽 특유의 고요와 쓸쓸함이 전해집니다. 김성란이 일출의 공간을, 김애란이 새벽의 정서를 붙잡는다면 김미지는 식물들의 치열한 생존 방식에 주목합니다. ■ 사람이 떠난 의자에 꽃이 피었다 소현경의 〈초록의 기억-시간의 층위〉에는 고풍스러운 의자 한 개가 놓여 있습니다. 곡선으로 장식된 등받이와 팔걸이, 가느다란 다리까지 본래의 형태는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앉아야 할 자리에는 풀이 자라고 하얀 꽃이 피었습니다. 나비들이 그 주변을 날아다닙니다. 사람이 떠난 의자는 작은 정원으로 변했고, 비어 있는 자리는 지나간 시간을 환기합니다. 오래된 집을 떠올릴 때 그곳에 살던 사람보다 마당의 나무나 방 한구석의 의자가 먼저 생각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현경은 사물에 남은 기억을 식물의 생명력과 결합했습니다. 김연옥의 〈생의 변주 I〉는 꽃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룹니다. 분홍색 꽃을 중심으로 초록과 푸른색의 유기적인 무늬들이 퍼져 있습니다. 세포와 혈관을 연상시키는 선들은 서로 얽히고 갈라집니다. 꽃잎의 아름다움보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생명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인 작업입니다. 김연옥은 올해 9월 미술 전문 월간지 『미술세계』의 표지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소현경의 의자에는 지나간 시간이, 김연옥의 꽃에는 살아 있는 조직의 변화가 새겨져 있습니다. ■ 씨앗 하나에 담긴 우주의 시간 이수진의 〈별빛 씨앗〉은 지름 110㎝의 원형 작품입니다. 작은 점과 짧은 붓질들이 촘촘하게 모였다가 흩어집니다. 어떤 부분은 여러 색이 빽빽하게 맞물리고, 다른 곳에서는 간격이 느슨해집니다. 미세한 차이들이 정지된 그림에 리듬을 부여합니다. 사각형의 틀을 벗어난 형식도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뚜렷한 시작점이나 끝을 찾기 어려운 원 안에서 색들은 중심과 가장자리를 오가며 순환합니다. 이수진은 올해 5월 담소갤러리에서 제12회 개인전 《별빛 씨앗》을 열었습니다. 씨앗은 작은 몸 안에 앞으로 자라날 생명의 시간을 품고 있습니다. 별빛은 먼 우주에서 출발해 오랜 세월을 지나 우리에게 도착합니다. 크기와 거리는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두 존재에는 눈앞에서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수진은 씨앗이나 별의 형태를 직접 그리지 않습니다. 무수히 반복한 붓질로 생명의 탄생과 확산을 추상화합니다. 작은 색의 흔적들이 서로 만나면서 개별적인 존재를 넘어서는 거대한 질서를 이룹니다. 작가는 〈별빛 씨앗〉 연작으로 최근 제62회 경기미술대전 서양화 부문 최우수상도 받았습니다. 김남호의 〈보화를 찾았네〉에서는 빛과 색의 관계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분홍과 노랑, 초록과 파랑이 강렬하게 충돌하는 작품에는 축광안료와 혼합재료가 사용됐습니다. 빛을 흡수했다가 다시 방출하는 안료의 특성을 회화의 요소로 끌어들였습니다. 이수진이 붓질의 반복으로 빛의 확산을 표현한다면, 김남호는 재료 자체가 지닌 성질을 활용합니다. ■ 한지의 섬유, 흙의 입자가 남긴 흔적 박용운의 〈대지의 숨결〉은 흰 한지와 닥지의 섬유로 이루어졌습니다. 가느다란 섬유들이 겹치고 갈라지며 크고 작은 굴곡을 만듭니다. 두껍게 모인 부분과 얇게 펼쳐진 부분의 차이가 미세한 음영을 형성합니다. 산이나 들을 직접 묘사하지 않았지만 종이의 거친 결에서 오래된 지층이나 마른 땅의 균열이 연상됩니다. 정형준의 〈Play of Clay 제주의소리〉는 흙과 아크릴, 마대를 사용했습니다. 붉은빛이 감도는 표면에는 입자가 뭉치고 갈라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거칠고 불규칙한 질감은 제주 화산지형을 떠올리게 합니다. 박용운에게는 한지의 섬유가, 정형준에게는 흙의 입자가 중요한 조형 요소입니다. 재료를 다루는 손길과 물질 고유의 성질이 함께 작품을 완성합니다. 종이가 겹쳐지고 흙이 굳는 과정에서 생긴 흔적들이 붓으로 그린 형상 못지않은 표현력을 갖습니다. ■ 붉은 숨골, 보이지 않는 제주의 내부 이해성의 〈숨골여지도〉는 붉은색을 중심으로 제주의 지형을 재구성했습니다. 바위와 땅의 구조를 연상시키는 형상들이 겹쳐 있습니다. 제목에 등장하는 숨골은 빗물 등이 지하로 스며드는 통로로, 화산섬 제주의 물 순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형입니다. 바다와 오름, 한라산과 현무암이 제주의 외형을 이룬다면, 땅 아래에서는 물이 스며들고 이동하는 또 다른 구조가 작동합니다. 이해성은 평소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의 세계를 붉은 형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지현의 작품에서는 보석의 매끈한 광택 대신 거친 질감과 불규칙한 선이 두드러집니다. 흰 바탕을 가로지르는 검은 선과 꽃을 연상시키는 장식, 두껍게 처리된 물감이 다이아몬드의 익숙한 이미지를 낯설게 만듭니다. 신찬식의 〈연꽃과 물고기〉는 화선지에 수묵으로 그린 작업입니다. 푸른 어항과 물고기, 붉은 연꽃이 어우러집니다. 동아시아 회화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소재들이 간결한 필치와 선명한 색채로 새로운 표정을 얻었습니다. ■ 작업실에서 일상으로, 담소가 걸어온 길 이번 전시에는 작가들의 창작을 뒷받침해 온 민간 예술공간의 발자취도 담겨 있습니다. 제주시 연동의 담소창작스튜디오는 2018년 문을 열었습니다. 민간의 지원으로 마련된 공간에서 작가들에게 작업실을 무상 제공하고, 작품 발표와 교류의 기회를 마련해 왔습니다. 2024년 담소갤러리를 조성한 데 이어 올해 8월에는 제주시 은남4길에 윈도우갤러리를 개관했습니다. 개관전 《동주공제(同舟共濟)-연동, 그 기억의 초상》에서는 김순관 대표를 비롯한 작가 16명이 자화상과 지역 주민들의 초상화 등 32점을 선보였습니다. 작업실 안에서 이어온 창작이 동네의 삶과 만난 자리였습니다. 입주작가들의 전국 규모 미술대전 수상과 미술 전문지 표지 작가 선정, 다른 지역 갤러리와의 협업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닮음과 다름전》은 작가들의 활동이 호텔 로비라는 새로운 장소로 옮겨온 자리입니다. 전시장을 일부러 찾지 않은 여행객도 작품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2018년 연동의 작업실에서 출발한 담소의 예술은 이제 갤러리와 거리를 지나 여행객의 일상으로 스며들고 있습니다. 전시는 오는 11월 30일까지 제주부영호텔 로비에서 열립니다.
2026-10-11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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