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편리해질수록 누가 아팠을까”… 제주 돌담 틈에서 태어난 요정이 물었다
호랑이가 물가에서 등불을 들고 있습니다. 수달은 나비를 바라보고, 분홍색 셔츠를 입은 고릴라는 나무뿌리에 기대어 쉽니다. 곱슬머리의 작은 요정은 맨발로 그들 사이에 앉아 있습니다. 나무에서는 흰 잎들이 길게 늘어지고, 짙푸른 밤하늘에는 작은 빛들이 떠 있습니다. 물가의 버섯들은 청록색으로 빛납니다. 호랑이는 사냥하지 않고, 수달은 위험을 피해 달아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생명들이 한 공간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한항선이 그린 숲입니다. 이 다정한 세계가 태어난 곳은 역설적으로 나무와 돌담이 사라져가는 제주입니다. “한 달 주기로 나무와, 풀과, 돌담이 사라졌다. 물이 흐르던 곳들은 시멘트로 메워져 썩은 악취가 진동을 하고 익숙했던 풍경들은 콘크리트 숲으로 변해갔다.” 제주에서 태어나 섬과 육지를 오가며 그림을 그려온 한항선이 목격한 변화입니다. 익숙한 풍경이 사라지는 동안 새로운 건물과 시설이 들어섰습니다. 인간에게는 발전과 편리함으로 기록된 시간이 다른 생명에게는 살아갈 공간을 잃어가는 시간이었을 수 있습니다. 한항선은 “내가 느꼈던 편리함이 그들에겐 큰 아픔이었음에 잠시나마 ‘트멍이’를 통해 반성의 마음을 전한다”고 작업 배경을 밝혔습니다. 그 마음에서 인간과 동물의 모습을 함께 지닌 작은 존재 ‘트멍이’가 태어났습니다. 지난 2일 제주시 갤러리 이호에서 시작된 한항선의 개인전 《트멍; 땅속 깊이 뿌리내린, 다정한 온기》는 사라진 풍경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해 다른 생명과 함께 살아갈 공간을 상상합니다. ■ 돌담의 빈틈은 누가 비워둔 자리인가 ‘돌담에도 트멍이 있어사 된다.’ 제주에 전해오는 옛말입니다. ‘트멍’은 구멍이나 틈새를 뜻하는 제주어입니다. 제주의 돌담은 돌과 돌 사이를 완전히 메우지 않습니다. 거센 바람에 맞서기보다 바람이 지나갈 길을 남겨둡니다. 돌담을 지탱하는 힘이 오히려 그 빈틈에서 나옵니다. 한항선은 이 오래된 지혜에서 작품의 중심 개념을 가져왔습니다. 돌과 돌 사이의 틈은 비어 있기에 바람을 받아들이고, 바람이 지나갈 수 있기에 돌담은 제자리를 지킵니다. 어느 한쪽이 모든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의 존재를 견디는 셈입니다. 그런데 돌담의 빈틈을 인간과 다른 생명의 관계로 옮겨놓으면 질문은 한층 날카로워집니다. 누군가에게 살아갈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누가 자신의 공간을 비워야 할까. 인간이 편리함을 위해 차지해 온 공간을 조금 덜어낼 때, 다른 생명에게는 살아갈 자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포기해야 할 편리함이 다른 생명에게는 생존의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트멍은 무엇을 더 채울 것인가보다, 무엇을 남겨두어야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 현무암을 머리에 얹은 아이, 사라진 풍경의 무게를 지다 트멍이는 머리에 현무암을 얹고 있습니다. 인간을 닮은 얼굴에 동물의 특징을 함께 지닌 작은 존재입니다. 한항선은 트멍이를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서로를 이어주는 매개체로 만들었습니다. 머리 위의 현무암에는 제주에서 목격한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나무와 풀이 사라지고 물길이 메워지는 풍경에서 인간이 자연에 남긴 흔적을 읽었습니다. 한항선은 제주의 변화를 현대사회의 축소판으로 바라보며, 그 시간을 ‘우리가 짊어져야 할 현 시대의 무게’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트멍이는 제주의 돌을 머리에 이고 다른 생명들 사이에 앉아 있습니다. 작은 몸 위에 놓인 현무암은 제주라는 장소의 표식이자 인간이 남긴 변화의 무게로 읽힙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한항선은 인간중심적인 삶을 반성하면서도 인간이 중심이 되어 다른 생명을 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세계를 지배할 권리가 없다고 보면서도, 인간이 훼손한 자연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묻고 있습니다. 트멍이는 그 두 생각 사이에 서 있습니다.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에게만 속하지 않고, 동물들과 어울려 살아가면서 인간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 사냥하지 않는 호랑이, 고통을 지운 숲의 역설 한항선의 숲에서 호랑이는 등불을 듭니다. 포식자의 발톱과 이빨보다 어둠을 밝히는 행동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수달은 나비에게 손을 내밀고, 고릴라는 나무뿌리에 몸을 기댑니다. 현실의 자연에서는 포식과 경쟁, 죽음과 재생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한항선의 숲에서는 생존을 둘러싼 긴장 대신 평화로운 일상이 펼쳐집니다. 한항선은 “트멍이와 친구들은 그림 속에서 만큼은 고통스럽지도 연약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평화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있습니다. 모든 생명이 안전하게 살아가는 세계를 그리기 위해 자연의 일부인 포식과 경쟁을 화면에서 덜어냈습니다. 생명들의 공존을 상상하면서 실제 자연에 존재하는 갈등은 잠시 지워둔 셈입니다. 한항선은 현실의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갈등을 덜어내고, 상처받은 생명들에게 고통 없는 시간을 내어줍니다. 등불을 든 호랑이에게서 포식자의 위협은 사라지고, 나비를 바라보는 수달에게서도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림 안에서 가능한 평화가 그림 밖에서도 가능하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 한항선의 유토피아는 그 질문을 남깁니다. ■ 비움을 말하면서 화폭은 가득 채웠다… 붓질 사이에도 ‘트멍’ 그림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촘촘합니다. 나무껍질의 굴곡과 잎맥, 이끼와 풀의 표면에 수많은 붓질이 쌓여 있습니다. 짙은 녹색과 연두색, 청록색이 겹쳐지고 검푸른 밤하늘에는 작은 빛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흰 잎들은 길게 늘어지고, 물가의 버섯들은 저마다 다른 빛을 냅니다. 전시의 중심 개념은 비어 있는 틈인데, 정작 그림에는 작은 풀 한 포기까지 빼곡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이 촘촘한 붓질 사이에도 ‘트멍’이 있습니다. 한항선은 한지 위에 세필붓으로 가로 방향의 채색을 여러 차례 반복합니다. 그 과정에서 붓질과 붓질 사이에 미세한 틈이 우연히 생겨납니다. 이러한 틈에도 ‘트멍’의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제주 돌담에서 바람이 지나가는 길이었던 트멍이 한지 위에서는 붓질 사이에 나타납니다. 돌을 쌓으며 남겨둔 틈과 색을 쌓다가 생겨난 틈이 하나의 개념으로 이어집니다. 비움은 작품의 주제인 동시에 제작 과정에도 스며 있습니다. 한항선은 세필붓으로 색을 여러 차례 올리는 작업을 수행에 비유했습니다. 주어진 재료를 남김없이 사용하며 붓질마다 마음을 쌓아간다고 설명했습니다. 풀 한 포기, 버섯 하나에도 공들인 흔적이 배어 있습니다. 촘촘하게 쌓인 색과 선에는 작은 생명 하나도 소홀히 지나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숲을 생명으로 가득 채우면서 인간에게는 무엇을 비워둘 수 있는지 묻습니다. ■ 누군가의 쉼을 위해, 인간은 무엇을 비워둘 수 있을까 한항선이 기억하는 제주에는 나무와 돌담이 있었고, 물이 흐르던 길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건물과 시멘트가 들어섰습니다. 새로 들어선 것들은 눈에 보이지만, 사라진 것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에서 희미해집니다. 트멍이는 그 사라진 자리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개발할 수 있어도 남겨두는 숲, 더 많은 것을 차지할 수 있어도 비워두는 공간. 다른 생명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선택에는 인간의 불편함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한항선은 “아파하는 동물들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게도 잠시나마 ‘트멍’이 되어주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돌담의 작은 틈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 공간을 차지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 가운데 무엇을 비워야 다른 생명이 편안해질 수 있을까. 그 질문을 품은 한항선의 개인전 《트멍; 땅속 깊이 뿌리내린, 다정한 온기》는 오는 9일까지 열립니다. 제주자치도와 제주문화예술재단의 2026년도 문화예술지원사업 후원으로 마련됐습니다.
2026-11-03
제주방송 김지훈 (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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