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몸이 지나간 자리, ‘질척이는 틈’
발을 내딛으면 바닥이 먼저 반응합니다. 푹 꺼지고, 밀리고, 들러붙습니다. 조금 전 누군가 찍어놓은 발자국 위로 다른 발이 올라옵니다. 손바닥을 짚으면 손의 크기가 박히고 몸을 눕히면 한 사람이 머물렀던 만큼 자리가 패입니다. 이 방에서는 작품을 망가뜨릴까 몸을 사릴 이유가 없습니다. 밟고, 만지고, 누워도 됩니다. 해가 저물 무렵에는 같은 바닥에서 춤을 춥니다. 먼저 찍힌 자국은 다음 몸에 밀려 흐려집니다. 그 위로 새 자국이 포개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엇이 지워졌고 무엇이 새로 생겼는지 가려내기 어려워집니다. 양희연의 개인전 《질척이는 틈》이 펼쳐진 서울 을지로 스페이스유닛플러스입니다. 방을 뒤덮은 재료는 유토(油土)입니다. 쉽게 굳지 않아 거듭 만지고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조소 재료입니다. 작가는 이 물질로 지글거리는 태양의 표면을 닮은 노란 방을 만들었습니다. 전시 기간 매일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몸짓을 새기고, 문지르고, 다시 고릅니다. 관객도 들어갑니다. 체중과 체온, 움직임이 유토에 찍히고 앞서 다녀간 이들의 자국과 뒤엉킵니다. 전시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마지막 모습은 아직 없습니다. ■ ‘조금만 더’가 끝나지 않는 밤 ‘질척이다’. 물기가 많아 진득하게 들러붙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말, 어쩐지 사람의 마음에도 곧잘 붙습니다. 오래 품은 미련, 끝내지 못한 관계, 지나갔다고 여겼다가 불쑥 되살아나는 기억에도 씁니다. 후각까지 건드리는 단어입니다. 양희연은 그 감각을 방 하나의 용량으로 키웠습니다. 작업의 출발점에는 ‘끝내지 못한 밤’이 있습니다. 불을 끄지 못하고 잠드는 밤, 하루를 매듭짓지 못한 채 조금 뒤로 미뤄두는 시간입니다.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고 이미 끝난 마음을 또 한 번 시곗바늘에 걸어놓습니다. 작가 노트에는 조금 더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 같고, 조금 더 붙잡으면 달라질 것 같아 자꾸 끝을 미루게 되는 마음이 등장합니다. 그 마음 옆에 놓인 물질이 유토입니다. “유토는 굳지 않는다. 언제든 다시 만질 수 있고, 다시 물러진다.” 왜 하필 이 재료인지 선명해지는 대목입니다. 굳지 않으니 다시 누를 수 있고, 뭉갤 수 있고, 어제의 모양을 오늘 바꿀 수 있습니다. 관객이 발을 들이는 순간 이 성질은 생각에서 촉감으로 내려옵니다. 달라붙고 발이 빠집니다. 걸음이 늦어지고 자세가 틀어집니다. 다음 발을 어디에 놓을지 몸이 다시 계산합니다. 사람이 유토를 움직이는 사이 유토도 사람의 몸에 자기 속도를 요구합니다. 관성과 본능의 힘겨루기, 그 사이에서 서로의 농도를 바꾸는 듯한 묘한 경험입니다. ■ 지나간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 사이 ‘질척이는 틈’에서 틈은 공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시간에도 틈이 생깁니다. 시계는 한 방향으로 갑니다. 기억은 제멋대로 움직입니다. 지나간 일을 오늘로 데려오고, 불안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미리 당겨옵니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동시에 잡아당깁니다. 작가 노트에는 그렇게 기억과 감각이 뒤엉키면서 좀처럼 흘러가지 않는 시간이 생겨나는 순간이 적혀 있습니다. 양희연은 그 시간을 하나의 방으로 가져왔습니다.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사이. 떠났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무엇이 잠시 머무는 자리입니다. 사람들은 그 안으로 들어와 유토를 밟고 만집니다. 자기 자국을 만들고 다른 사람의 자국을 밀어냅니다. 먼저 있던 손자국은 다음 손에 눌리고, 발자국은 또 다른 발 아래에서 모양을 잃습니다. 아무도 한 자리를 오래 차지하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지나간 시간은 완벽하게 증발하지 않습니다. 움푹 팬 자리와 밀려난 유토, 포개진 자국 속에 조금씩 섞입니다. 이 방에서 시간은 직선보다 퇴적에 가깝습니다. ■ 물질도 사람을 움직인다 이 대목에서는 정치철학자 제인 베넷(Jane Bennett)의 『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을 곁에 놓아볼 만합니다. 베넷은 인간과 비인간을 가로지르는 ‘생동하는 물질성(vital materiality)’에 주목합니다. 인간만을 행위의 중심에 놓기보다 사물과 물질을 포함한 여러 힘이 사건에 관여하는 방식을 살핍니다. 을지로의 유토 앞에서는 그 철학이 꽤 육체적인 감각으로 번역됩니다. 발을 디디면 꺼집니다. 떼려 하면 붙잡습니다. 중심이 흔들리고 다음 보폭이 달라집니다. 사람이 유토의 모양을 바꿉니다. 방금 달라진 유토는 다음 사람의 자세를 바꿉니다. 어느 순간 만드는 몸과 움직이게 하는 물질을 말끔히 나눠놓기가 어려워집니다. ■ 제주에서 만진 이끼, 서울에서 밟는 유토 양희연은 산업물질에 피부와 온기를 부여하며 인간과 물질 사이에서 생기는 감각과 관계를 조각과 설치로 탐색해온 작가입니다. 손으로 재료를 만지고 조각하면서 익명의 산업물질을 신체가 가까이 갈 수 있는 덩어리로 바꾸는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지난해 부산 홍티아트센터에서 선보인 《접촉 가능 구역: 스킨십 서클》에서는 관객이 작품을 직접 만졌습니다. 시각에 집중되기 쉬운 전시장에서 촉각과 청각까지 불러내 낯선 존재와 가까워지는 방식을 실험했습니다. 올해 작업실은 제주에도 있습니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이 운영하는 예술곶 산양 레지던시 6기 입주작가로 선정돼 제주에서 창작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난 6월에는 저청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과 흙과 이끼를 손으로 뭉쳐 작은 ‘숨-볼’을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은 손바닥 위 작은 생명체를 돌보고 저마다의 이끼 마을을 꾸렸습니다. 제주의 이끼와 을지로의 유토는 재료도 크기도 다릅니다. 제주에서는 흙과 이끼가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서울에서는 사람이 통째로 유토의 방 안으로 들어갑니다. 감각의 반경은 손끝에서 전신으로 커졌습니다. 《질척이는 틈》에는 여기에 시간이 깊숙이 끼어듭니다. 만진 자리에는 자국이 생기고 그 위로 다른 사람의 시간이 얹힙니다. ■ 해가 지면 춤을 추는 이유 이 전시는 시계보다 해를 따라갑니다. 정오에 시작해 일몰에 하루를 마칩니다. 매일 해가 지는 시각에는 사람들이 유토 위에서 춤을 춥니다. 왜 일몰일까. 양희연은 하루와 몸,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붙잡고 싶은 마음과 상관없이 해는 집니다. 준비됐는지를 묻지도 않습니다. 작가는 일몰의 춤을 유한성을 받아들이기 위한 작은 연습으로 바라봅니다. 당장 무엇을 버리거나 애써 잊는 의식이라기보다, 붙잡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 결국 끝에 닿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확인하는 일입니다. 하루 동안 수없이 눌리고 뒤집힌 유토 위에서 다시 몸을 움직입니다. 끝을 미뤄온 사람들이 해가 지는 순간만큼은 그 끝을 함께 통과합니다. ■ 을지로 한복판에 생긴 ‘노란 방’ 《질척이는 틈》이 자리 잡은 곳은 서울 중구 을지로 143 1층 스페이스유닛플러스(Space Unit+)입니다. 제작소와 상점, 오래된 건물과 새로운 문화공간이 포개진 을지로에서 이번에는 좀처럼 굳지 않는 유토가 방 하나를 차지했습니다. 완성된 작품을 벽에 걸어두는 대신 전시가 진행되는 시간 자체가 작품 안으로 들어옵니다. 오늘의 방과 내일의 방이 다릅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그들이 남기는 무게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시 마지막, 노란 방도 사라집니다. 그동안 만들고 지우고 밀고 덮었던 유토를 모두 긁어모읍니다. 손자국과 발자국, 몸이 누웠던 자리와 춤추며 뭉개진 굴곡이 하나로 섞입니다. 누구의 것이었는지, 어느 날 생겼는지를 구분하던 정보도 그 순간 소용을 잃습니다. 양희연은 그 마지막 덩어리를 ‘불 덩어리(The Burning Mass)’라 부릅니다. 여기에서 오르페우스와 롯의 아내가 등장합니다. 둘에게 주어진 금기는 ‘뒤돌아보지 말라’였습니다. 그러나 둘은 돌아봤고 대가를 치렀습니다. 작가는 그 오래된 이야기를 다른 방향에서 읽습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나는 계속 부정해야 할 나의 모습일까.” 지나간 시간을 바라보는 일을 실패나 미련으로만 규정할 수 있는지 되묻는 문장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은 ‘어떻게 잊을까’에서 조금 비켜섭니다. “뒤를 돌아봐 돌이 되는 대신, 불이 된 이 덩어리와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까.”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사이에는 지금이 있습니다. 처음 발을 디뎠던 유토를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지우면 없어지는 대신 다른 모양이 되고, 밀어내면 옆으로 옮겨가며, 새로운 몸을 만나 또 달라집니다. 《질척이는 틈》은 오는 23일까지 열립니다.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정오부터 일몰까지 관람할 수 있습니다. 전시 기간 설치와 퍼포먼스 현장은 유튜브 라이브로도 공개됩니다.
2026-08-15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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