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들, 풍경이 아니라 살아남은 감각”… 백성원의 ‘신촌별곡’, 자연을 통과한 이후의 인간을 기록하다
자연을 본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연을 통과합니다. 보고, 스치고, 머물다 떠납니다. 남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그 통과의 감각입니다. 바로 그 ‘이후’를 다루는 전시입니다. 다음 달 7일부터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 B1 제주갤러리에서 열리는 백성원 작가의 개인전 ‘신촌별곡’입니다. 회화 39점과 입체 8점 등 모두 47점을 선보입니다. ■ 재현이 아닌 통과를 기록하다 ‘묘사’하지 않습니다. 산과 바다는 화면에 등장하지만 그것은 풍경이 아니라 흔적에 가깝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보다 무엇이 남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작가는 자연을 하나의 사건으로 다룹니다. 빛이 한 방향으로 쏟아졌던 시간, 바람이 지나가며 화면의 밀도를 바꾼 순간, 습도가 물감의 건조 속도를 바꾼 조건까지 포함한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화면은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자연이 통과한 이후의 상태로 기록됩니다. ■ 이미지보다 로그에 가까운 회화 작업은 자연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습니다. 자연을 경험하는 과정 자체를 화폭에 남깁니다. 붓질은 사물을 가리키기보다 반응을 남깁니다. 그래서 이 회화는 이미지라기보다 일종의 로그(log)에 가깝습니다. 자연과 몸이 만났던 순간의 흔적, 반응, 미세한 어긋남이 층층이 쌓인 기록입니다. ■ 시간의 반복, 화면을 만들다 화면에는 하나의 완결된 장면이 없습니다. 덧칠과 긁기, 마름과 번짐이 반복되면서 형상은 고정되지 않습니다. 형태는 목표가 아니라 결과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부산물입니다. 회화의 중심은 항상 ‘형태 이전’에 있습니다. 시간의 반복은 형상을 밀어내고, 그런 시간의 흔적이 화면의 구조를 만듭니다. ■ 관계로 작동하는 색의 사용 작가의 작업에서 색은 자연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관람자와 화면 사이의 관계를 만듭니다. 파랑은 바다를 닮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깊이를 만들기 위해 쓰입니다. 황색은 햇빛을 가리키기보다 공간의 두께를 만듭니다. 색은, 보기 위한 대상이 아니라 머무르기 위한 조건으로 작동하는 일종의 장치인 셈입니다. ■ 관람, 체류가 되다 화면에는 중심이 없습니다. 시선이 수렴할 지점이 없습니다. 그래서 관람객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느려집니다. 무엇을 보았는지를 말하기보다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를 기억합니다. 관람은 관찰이 아니라 머물면서 작품 안에 들어가는 경험이 됩니다. ■ ‘신촌’의 의미와 감각적 조건 작가에게 신촌은 특정 지명이 아닙니다. 감각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상태의 이름입니다. 몸은 자연을 다시 감지하고, 눈은 빛을 무게로 느끼며, 시간은 느려지기 시작한 상태를 환기합니다. 이 전시는 자연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실제로는 인간 인식의 상태 변화를 다룹니다. ■ 이 작업이 지금 의미를 갖는 이유 자연을 다루는 회화는 많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다루는 방식은 바뀌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느냐보다,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입니다. 백성원의 작업은 이 변화를 화면의 구조로 옮깁니다. 자연을 이미지로 재현하지 않고, 자연을 통과하는 감각의 변화를 회화라는 질서로 조직합니다. ‘신촌별곡’은 자연을 그리는 게 아니라, 자연 속에서 인간의 감각이 어떻게 다시 배치되는지를 보여주는 전시입니다. ■ 작업 궤적과 형식의 변화 백성원의 작업은 갑작스러운 변화의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느린 이동의 축적입니다. 2018년 첫 개인전 ‘자연제주’에서 자연을 재현의 대상으로 다루는 회화를 선보였고 이후 ‘화산도’, ‘응집과 퇴적의 물성’, ‘중첩된 감각: 신촌’, ‘감각적 공명’으로 이어지는 연작을 통해 점점 자연을 덜 닮고 더 많이 통과시키는 방향으로 이동해 왔습니다. 형태는 줄고, 시간은 늘었습니다. 장면은 사라지고, 조건이 남았습니다. 재현에서 반응으로, 이미지에서 상태로 이동했습니다. 이 변화는 제주라는 장소에서 천천히 진행됐습니다. 화산 지형의 퇴적, 바람의 반복, 습도의 계절적 변화 속에서 ‘무엇을 그릴 것인가’보다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로 작업은 이동했습니다. 그 이동이 다다른 지점이 ‘신촌별곡’입니다. 작가는 “2019년 ‘화산도’ 연작 일부를 이번 전시에 함께 배치했다”며 “초기 작업부터 최근까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고 전시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어 “이번 전시는 결과보다 그 이동을 보여주는 전시”라고 덧붙였습니다. 전시는 내년 1월 26일까지 이어집니다.
2025-12-29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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