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를 걷다, 그림 속 바람을 만났다
객실 번호를 찾던 걸음이 뜻밖의 자리에서 멎습니다. 창으로 스며든 빛이 캔버스의 색과 겹치고, 수영장으로 향하던 통로는 어느새 그림 앞에 잠시 서는 자리가 됩니다. 호텔 안에서 가장 빨리 지나치던 공간이 사람을 붙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랜드 조선 제주가 복합문화공간 뉴스프링프로젝트와 함께 강임윤 작가의 개인전 《BEYOND THE WIND: Italy to Jeju》를 6일부터 11월 1일까지 선보입니다. 본관과 힐 스위트에 작품 12점을 나눠 배치했습니다. 로비 한쪽을 전시장으로 꾸미는 익숙한 구성 대신, 복도와 휴게 공간, 라운지 등 투숙객의 생활 동선 안으로 회화를 들였습니다. 눈여겨볼 대목은 작품 수보다 작품이 놓인 자리입니다. 그림은 호텔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에 머물지 않고, 평소 시선을 받지 못했던 장소의 쓰임까지 바꿉니다. 작품을 따라 복도와 라운지를 살피다 보면 배경으로 여겼던 공간이 전시를 완성하는 또 하나의 주역으로 떠오릅니다. ■ 강임윤의 회화, 혹은 풍경보다 오래 남은 감각 강임윤의 그림에는 물과 식물, 들판과 길을 연상시키는 형상이 나타납니다. 윤곽은 느슨하게 열려 있고, 색이 번지고 포개지며 끊임없이 자리를 바꿉니다. 특정 풍경을 충실히 옮기기보다 시간이 흐른 뒤 몸에 남은 빛과 공기, 움직임을 회화의 언어로 되짚습니다. 작가는 영국 슬레이드 미술학교와 왕립미술원을 거쳐 이스트 런던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영국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런던 티모시 테일러 갤러리와 노르웨이 트론헤임 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현재 작업의 거점은 이탈리아 밀라노입니다. 머물렀던 도시는 이력서를 채운 지명으로 그 역할이 끝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기후와 계절, 언어와 생활이 색채와 붓질 사이에 스며들며 강임윤 회화의 깊이를 만들어왔습니다. 전시 제목 《BEYOND THE WIND: Italy to Jeju》에도 이동의 시간이 새겨졌습니다. 여러 장소를 통과하며 다듬어진 감각은 작품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제주로 건너왔습니다.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축적된 작업은 제주의 빛과 공기 안에서 새로운 해석을 얻습니다. ■ 〈표류〉와 〈저류〉, 물 가까이 놓인 그림 본관 3층 풀사이드 갤러리에는 〈Mamma Mia II〉, 〈Drift(표류)〉, 〈Undercurrent(저류)〉와 타원형 캔버스 연작이 걸렸습니다. 〈표류〉와 〈저류〉라는 이름은 겉으로 드러난 움직임과 수면 아래 잠긴 힘을 함께 불러냅니다. 여러 나라와 도시를 오가며 이어온 작업의 시간과도 맞물립니다. 작품은 물 가까이에 자리했습니다. 유리창을 통과한 햇빛과 수영장 물결이 만든 반사가 캔버스를 스쳐 지나면, 같은 그림도 날씨와 시간에 따라 다른 인상을 건넵니다. 타원형 캔버스는 사각 프레임의 익숙한 질서를 비껴갑니다. 모서리가 사라진 형태는 씨앗과 알, 눈동자와 잔잔한 수면을 연상시킵니다. 캔버스의 외곽선까지 회화의 일부로 작동합니다. 벽에 걸린 그림은 빛의 이동을 받아 매 순간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같은 작품 앞에서도 오전과 오후의 감상이 달라지는 이유입니다. ■ 봄과 들판, 열매와 길… 제주 풍경과 마주하다 힐 스위트 6층 헤븐리 라운지에는 〈Primavera(봄)〉, 〈Prato(들판)〉, 〈Fruitbearer(열매 맺는 이)〉, 〈Path(길)〉이 놓였습니다. 작품 제목을 차례로 따라가면 하나의 시간이 열립니다. 봄이 오고, 들판에서 생명이 자라며, 열매를 맺은 뒤 다시 길이 이어집니다. 강임윤의 회화는 완결된 경치보다 변화하는 과정에 시선을 둡니다. 자라고 번지며 사라졌다가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생명의 운동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창밖으로 펼쳐진 제주의 숲과 하늘은 그림과 한 공간을 나눕니다. 작품 속 들판과 현실의 식생은 서로를 모방하는 대신 각자의 속도로 감상의 폭을 넓힙니다. 투숙객은 라운지에 앉았다가 그림을 발견하고, 창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다시 작품에 둡니다. 계획에 없던 시선의 왕복도 전시를 감상하는 한 방법입니다. ■ 흰 벽을 나온 회화, 생활의 시간으로 미술관과 갤러리의 흰 벽은 작품 외부의 요소를 줄여 감상에 집중하도록 설계된 공간입니다. 이른바 ‘화이트 큐브(White Cube)’입니다. 그랜드 조선 제주의 복도와 라운지에는 사람의 발걸음과 대화가 오가고, 날씨와 자연광도 시시각각 달라집니다. 작품은 호텔의 일상 한가운데 놓이며 주변의 소리와 빛, 움직임까지 감상에 끌어들입니다.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은 호텔을 위해 새로 제작된 작업이 아니어서 엄밀한 의미의 장소 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로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설치 장소가 작품을 읽는 법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는 점은 뚜렷합니다. 〈Path〉는 여행자가 오가는 길목에서 제목의 울림을 넓히고, 〈Drift〉는 잠시 체류한 뒤 떠나는 호텔의 시간과 맞닿습니다. 복도의 역할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이 쓰는 시간은 달라졌습니다. ■ 호텔과 예술, 머무는 경험을 다시 짜다 호텔과 미술의 만남은 낯설지 않습니다. 로비와 객실에 작품을 배치해 공간의 인상을 높이는 사례도 널리 자리 잡았습니다. 전시는 무엇을 소유했는가보다 투숙객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작품과 마주하는가에 무게를 싣고 있습니다.. 그랜드 조선 제주는 전시장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장소를 골라 작품을 나눠 배치했습니다. 객실을 나선 순간부터 복도와 라운지까지 이동, 그 자체가 관람의 일부가 됩니다. 호텔에서의 경험은 객실 밖에서도 만들어집니다. 체크인 뒤 객실까지 걷는 시간, 창가에 잠시 앉는 순간, 수영장으로 향하는 짧은 이동도 여행의 인상을 구성합니다. 기존 공간에 문화적 역할을 더한 이번 시도는 호텔이 체류 경험을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큰 시설을 새로 만들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장소를 다시 바라봤고, 투숙객이 오가는 동선을 전시의 일부로 끌어들였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제주 관광에도 참고할 만한 시도입니다. 체류의 질과 콘텐츠 밀도를 높이려면 시설 규모만큼 여행자가 장소를 받아들이는 과정도 세심하게 짜야 합니다. 같은 객실과 복도도 무엇을 만나게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기억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과 공간의 만남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관람객이 ‘왜 이 그림이 여기에 있는가’를 설명보다 먼저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작품과 장소의 관계도 힘을 얻습니다. 이번 전시는 이동과 시간의 축적이라는 강임윤의 작업 세계를 호텔의 체류 안으로 옮겨놓았습니다. 복도를 걷고 창가에 머물며 라운지에 앉는 평범한 순간이 회화를 만나 하나의 감상으로 번집니다. 그랜드 조선 제주 관계자는 “기존 전시 공간을 넘어 호텔 곳곳의 숨은 장소까지 예술적 경험의 무대로 확장했다”며 “강임윤 작가의 작품과 제주의 자연, 호텔 공간이 어우러져 일상과 여행 사이에서 새로운 영감을 발견하는 경험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전시는 11월 1일까지 본관 3층 복도와 휴게 공간, 힐 스위트 6층 헤븐리 라운지에서 진행됩니다. 관람 대상은 그랜드 조선 제주 투숙객입니다.
2026-08-06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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