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제주] ② 러너가 그린 여행 지도… 해안에서 숲까지, 관광 지형도가 바뀌었다
러너들의 발걸음은 취향의 분화가 아니라 제주의 지도를 다시 여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어디를 달리고’, ‘어디에서 멈추는가’가 소비와 이동의 축을 다시 짜고 있고, 이 변화는 감각이 아니라 구조를 재편하는 흐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2021~2025년 온라인 기록을 기반으로 제주관광공사가 분석한 러닝 이동 데이터는, 제주의 공간 구조가 어디에서 흔들리고 있고 어디에서 새롭게 열리고 있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줍니다. [연속기획] 이번 ②편은 그 실제 이동 패턴을 기준으로 제주의 관광 지형이 어떻게 재배치되고 있는지 를 짚습니다. ■ 첫 페이지는 하나로 모였다… 탑동–용두암–해안도로 제주 러닝 지도는 복잡하지만 출발선만큼은 하나로 모입니다. 탑동광장–용두암–해안도로. 러너들이 제주에서 첫 번째로 발을 딛는 지점입니다. 공항과의 거리, 열린 해안 시야, 야간 이용성, 도심·자연의 균형까지 네 가지 요소가 맞물리며 이 라인은 사실상 ‘제주의 첫 페이지’로 굳었습니다. 현장 러너 B씨는 “좋은 코스라는 건 모두 알기 때문에 주말 아침에는 속도를 유지하기 어렵다. 사람이 몰리는 시간대는 거의 행렬 수준”이라고 말했습니다. 수요는 이미 2025년 기준으로 폭증했지만, 공간 설계는 여전히 과거의 이용밀도에 머물러 있다는 얘기입니다. ■ 러닝은 직선이 아니라 ‘흐름’… 순환 소비가 만들어지는 지점들 데이터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징은 순환 이동입니다. 탑동–용두암–용연계곡–해안도로로 이어지는 반복 흐름이 자연스럽게 형성돼 있습니다. 이건 단순 왕복이 아니라 흐름 기반 소비 구조입니다. 달리고 돌아오고, 다시 이동하는 사이사이에 카페·편의점·F&B 이용이 들어오며, 한 지점이 아니라 여러 지점에서 소비가 연속적으로 발생합니다. 하지만 이 흐름을 떠받칠 안전 구조는 여전히 취약하기만 합니다. 야간 조도, 보행자·차량·러너의 혼잡, 구간별 동선 충돌 같은 문제는 수요 증가 속도를 버티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다. 러닝 크루 운영자인 C씨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면 우리도 크루 시간을 옮길 수밖에 없다.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코스 자체가 유지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 바다→도심→숲→오름→산… ‘세로형 확장축’이 형성됐다 트레일러닝 언급량은 2021년 43건에서 2025년 218건. 해안에 머무르던 발걸음은 숲과 오름을 지나 산 능선까지 올라섰습니다. 사라오름, 노꼬메·새별·물찻오름, 절물·교래 숲길, 한라산둘레길 등은 이제 러너들의 실제 지도에서 ‘연결된 동선’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해안–도심–숲–오름–산을 세로로 잇는 확장축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셈입니다. 문제는 역시나 이에 맞는 안내·관리 체계가 사실상 비어 있다는 점입니다. △조난 대응은 등산 속도 기준으로 설계, △러닝 속도·동선에 맞는 표지·안내 부족, △출입 제한 구역 경계 불명확, △이용 증가로 생태 부담 확대, △관리 인력은 과거 수준 그대로. 확장된 흐름은 이미 현실이지만, 이를 설명하고 뒷받침할 제주의 구조는 비어 있습니다. ■ 러닝 대회가 여행 달력을 바꿨다… ‘성수기’의 정의가 이동 중 지금 여행 일정은 계절보다 대회가 먼저입니다. 5월 제주국제관광마라톤, 6월 오름트레일러닝, 10월 트랜스제주. 러너들은 이들 일정에 맞춰 항공과 숙소를 선점합니다. 제주의 성수기는 ‘여름’이 아니라 대회가 열리는 달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다만 산업적 구조는 아직 초보 단계입니다. △대회 없는 달엔 상권이 비어 있음, △코스 관리 주체가 지자체·협회·업체 사이에서 분산, △상권 연계는 대부분 자발적 노력에 그치는 게 대부분입니다. 대회는 커졌지만, 이를 지역 경제 구조로 흡수할 장치가 없습니다. ■ 소비가 멈추는 지점이 달라졌다… 러닝이 그려낸 새로운 제주 소비 지도 러닝 여행은 제주의 소비 판을 조용히 바꿔 놓고 있습니다. 빠른 조식이 가능한 숙소, 샤워 동선을 고려한 호텔 구조, 코스 인근 카페·브런치·테이크아웃 매장, 그리고 러닝을 마친 뒤 크루 단위로 이동하는 로컬 소비까지. 러너들은 상권을 순환시키는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탑동–용두암–내륙 트레일로 이어지는 이동축 안에서 ‘멈추는 장소’가 과거와 전혀 다른 지점에서 형성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과거 관광이 특정 명소에 소비를 쏟아부었다면, 러너들은 이동 경로 자체에서 소비가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이 흐름을 시장 분석 또는 전략 신호로 받아들인 지역은 거의 없습니다. 러닝 특화 숙박, 회복·케어 서비스, 장비 렌털, 코스 기반 여행상품 등은 이제 시작 단계에 가깝습니다. 수요는 이미 눈앞에 있는데, 산업의 대응은 여전히 ‘초기 기획’ 수준에 머문 셈입니다. 한 숙박업계 관계자는 “러닝 손님은 패턴이 뚜렷하다. 새벽 체크아웃, 샤워 동선, 근거리 식당까지 모두 일정하게 나타난다”며 “이걸 분석해 서비스를 만든 사례는 거의 없다. 시장은 생겼는데 구조가 따라가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 데이터가 말하는 결론… 지도는 이미 바뀌었다, 남은 건 ‘현실을 따라잡는 속도’ 2021~2025년 누적 기록은 이 한 문장으로 압축됩니다. “러닝은 제주의 공간 배치를 실제로 바꾸고 있다.” 해안에서 출발한 발걸음은 도심을 지나 숲과 오름으로 올라섰고, 그 이동축은 이미 제주의 다음 구조를 그려 넣었습니다. 변화는 ‘오고 있다’가 아니라, 이미 현장에서 완성된 형태로 존재합니다. 지금 필요한 건 거창한 청사진이 아닙니다. 이미 형성된 흐름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지속 가능한 구조로 받아들이는 역량입니다. 변화는 이미 각자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흐름을 ‘제주 모델’로 이어 붙일 힘이 뒤따라야 할 시점입니다. ③편에서는 이 변화가 산업·정책·인프라 전반을 어떤 방식으로 흔들고 있는지, 그리고 러닝이 제주 관광의 경쟁력을 어떻게 다시 정의하고 있는지 를 분석합니다.
2025-12-11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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