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함을 견디는 예술, 짙어짐을 되돌려주는 몸… 희미해질수록 더 짙어지는 얼굴들, 기억의 새로운 질감을 만나다
박진희의 개인전 ‘이토록 희미하고 짙은’은 기억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기억이 남아 있는 방식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금속 위에 남은 부식의 흔적, 바닷물이 지나간 자리, 그리고 시간이 만든 주름들. 전시는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지만 우리가 제대로 보지 않았던 얼굴들을 현재형으로 불러옵니다. ‘동망(銅網)’이라는 산업적인 물질은 작가의 손을 지나며 기억을 받아들이는 피부가 됩니다. 바닷물로 적힌 문장들은 시간이 흐르며 금속을 서서히 변화시키고, 그 변화 자체가 하나의 서사가 됩니다. 지워짐과 남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이 과정은, 기억이 사라지는 대신 다른 층위로 이동해 왔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합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서두르지 않는 전시입니다. 천천히 스며들고, 번지고, 겹쳐지면서 관람자의 감각을 끌어당깁니다. 사진처럼 명확한 형상은 없지만, 화면 앞에 서면 이상하리만큼 익숙한 얼굴 하나 떠오릅니다. 본 적 없지만,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인 양 다가옵니다. ■ 금속의 피부에 남은 주름… 시간이 직접 그린 초상 박진희가 선택한 동망은 예측을 허용하지 않는 재료입니다. 빛을 받는 각도, 공기와의 접촉, 물의 농도에 따라 표정이 달라집니다. 작가는 이런 불확실성을 굳이 통제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에게 주도권을 넘깁니다. 부식으로 생긴 녹청은 주름으로 번지고, 그 결은 얼굴의 윤곽을 닮아갑니다. 금사와 동실은 손과 발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노동의 시간을 암시합니다. 작품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진행 중인 상태로 존재합니다. 보는 이들은 그 미완의 시간 앞에서 자신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호출하게 됩니다. ■ 수의가 날개로 바뀌는 순간… 이행의 감각 전시의 중요한 전환점은 ‘수의’를 다루는 방식에서 드러납니다. 작가는 마을 할머니들의 말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윤달마다 수의를 짓되 매듭을 짓지 않았다는 기억, 풀어놓고 떠나기 위한 마음, 남은 이를 묶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작품 ‘원삼 습의’에서 수의는 장례의 상징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옷은 점차 가벼워지고, 형태는 확장되면서 날개의 이미지를 띱니다.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던 의례는 다음 시간을 상상하는 장치로 이동합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는 이 지점에서 부드럽게 겹쳐집니다. ■ “그럭저럭 살아졌지”… 떨림으로 남는 말 전시는 큰 목소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짧고 낮은 언어들이 화면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그럭저럭 살아졌지”, “지금도 떨려”. 바닷물로 적히면서 시간의 힘으로 저마다 금속 위에 새겨딥니다. 특히 ‘베인 눈물의 서시’에서 문장들은 잘려 나가 아래로 매달립니다. 읽히는 텍스트가 아닌, 떨어지고 흔들리는 감각 그 자체에 가깝습니다. 의미를 전달하기보다 몸의 기억으로 남는 언어입니다. 말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떨림의 형태로 현재에 머뭅니다. ■ ‘백만 번의 숨’… 개인에서 집단으로 이어지는 기억 전시 후반부에서 기억은 개인의 서사를 넘어 확장됩니다. ‘활活의 춤–백만 번의 숨’은 여러 사람의 호흡이 하나의 구조로 모이는 장면입니다. 각자의 숨과 문장이 겹쳐져 하나의 날개를 만듭니다. 전시 기간 진행되는 바닷물 드로잉 워크숍은 이 구조를 실제로 확장합니다. 관람자가 남긴 작은 흔적들은 다음 전시로 이어질 재료가 됩니다. 혼자 완성되지 않는 기억은, 함께 기워지며 하나로 이어집니다. ■ 제주갤러리, 기억을 다시 쓰는 장소 이번 전시가 열리는 제주갤러리는 오랫동안 삶의 결을 예술로 번역해온 공간입니다. 지역의 서사를 소비의 이미지로 환원하지 않고, 기억의 층위로 끌어올려 왔습니다. 박진희의 작업은 이 장소성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개인의 생애가 지역의 기억으로 확장되고, 그 기억이 다시 예술의 언어로 번역되는 지점. 전시는 바로 그 교차점에서 가장 선명한 힘을 발휘합니다. ■ 희미함은 남아 있는 방식이다 ‘이토록 희미하고 짙은’은 과거를 정리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남아 있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금속에 남은 부식, 바닷물의 흔적, 매달린 문장들, 날개처럼 확장된 옷의 형상. 모든 순간이 하나의 감각으로 수렴됩니다. 희미함은 사라짐이 아니라, 남아 있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했던 얼굴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전시는 그 사실을 말없이, 그러나 깊게 끌어올립니다. 전시는 2025 제주갤러리 공모 선정 아홉 번째 기획전으로, 18일부터 2026년 1월 5일까지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 B1 제주갤러리에서 이어집니다. 무료 관람입니다. 2013년 제주로 이주한 작가는 여성의 일상과 노동, 공동체의 기억을 중심에 둔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생활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감각과 말해지지 못한 시간을 예술의 언어로 전환해 왔으며, ‘살림하는 붓질 전’, ‘4·3미술제’, ‘어쩌면 잊혀졌을 풍경’, ‘A.C.E 여성예술인 네트워크’, ‘도래할 풍경전’, ‘마을예술학당’ 등 다수의 전시와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특정 사건을 재현하기보다 사라진 듯 남아 있는 감각을 현재형으로 호명하는 작업 방식이 특징입니다. 삶의 틈에서 길어 올린 질문을 축적해 온 작업은 이번 전시 ‘이토록 희미하고 짙은’에서 하나의 밀도로 응축돼 드러납니다.
2025-12-14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