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펼쳐지는 감각의 복원 실험”
공필화 기반 드로잉·회화, 이미선 작가 17번째 개인전
13~22일, 제주시 ‘아라갤러리’에서 개최
# 우리는 매일 수많은 이미지를 보고, 수많은 정보에 반응합니다.
하지만 그중 얼마나 ‘진짜로’ 보고, 느끼고 그래서 멈춰 섰을까.
미국 하버드대학교 미술사학자 제니퍼 로버츠(Jennifer L. Roberts, 1969~)는 학생들에게 단 한 점의 그림을 세 시간 동안 바라보게 했습니다.
처음엔 불만이 터졌지만, 시간이 흐르자 학생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소년의 귀와 배경 커튼 주름의 유사성, 손가락과 찻잔의 직경 비율 같은 ‘보이지 않던 연결’들이 서서히 떠올랐습니다.
오래 바라보는 일은 그림을 바꾸지 않지만, 그림을 보는 시선을 바꿀 수 있습니다.
‘느림’은 더 이상 과거의 미덕이 아닙니다.
독일 출신 미디어미학자 루츠 쾨프닉(Lutz Koepnick, 1966~)은 저서 ‘느림에 대하여(On Slowness)’에서 느림을 “가속 사회에서 감각의 층위를 복원하는 현대적 미학 전략”이라 설명합니다.
그런 느림의 미학, 감정의 회복을 조용히 실천하는 전시입니다.
13일 제주시 아라갤러리에서 개막한 이미선 작가의 17번째 개인전, ‘치유의 정원에서 커피 한잔 하실래요’입니다.
전시에서는 공필화 기반의 드로잉과 평면 회화로 구성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 감정의 회복, 선으로 그린 정원
작가는 제주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감귤나무, 나뭇잎, 찻잔, 햇살의 결처럼 사소한 일상의 풍경을 천천히 바라보고 손끝으로 옮겨왔습니다.
대상은 그저 묘사되는 것이 아닌, 그 안에 깃든 감정과 시간의 결을 선묘로 직조한 정서적 풍경으로 제시됩니다.
정교한 선 하나, 고요한 여백 하나는 관람자의 마음을 서서히 건드립니다.
작가는 “지금은 감정이 다시 느려질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시는 선 하나로 말하고, 여백 하나로 마음을 데우는 시간을 꺼내 보게 합니다.
우리는 어느덧 그 감정 앞에 조용히 멈춰 섭니다.
■ 정교함을 넘어선 감정의 선, 공필화에서 출발하다
작가의 회화는 공필화(工筆畵) 전통에서 출발합니다.
공필화는 중국 전통 회화 기법 중 하나로, 정밀한 선묘와 치밀한 색감의 배합을 통해 섬세하고 사실적인 화면을 구성하는 양식입니다.
작가는 이 회화 기법을 단지 ‘정교함’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선은 감정을 따라 흔들리고, 그 밀도는 마음의 진폭을 따라 결정됩니다.
전통 회화의 규범 안에서 출발했지만, 작가의 선은 정서를 회화적으로 번역하는 도구로 전환됩니다.
그래서 이 회화는 묘사라기보다는 감정의 결을 따라 짜여진 풍경에 가깝습니다.
선은 사물의 외곽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울림을 그려내는 선이 됩니다.
바로 그 점에서 공필화는 작가에게 ‘기법’이 아니라 감정의 언어로 작동합니다.
■ 슬로우 아트와 감응의 미학
작가의 회화는 빠른 감상이나 즉각적인 반응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래 머물며 바라보는 ‘지연된 시선’이 필요합니다.
앞서 로버츠 교수가 말했듯, 충분한 시간이 쌓이면 화면 속 구조와 감정의 결이 서서히 드러나고, 그림은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느림은 단지 감상의 태도를 넘어, 감각을 복원하는 전략적 지연입니다.
독일의 미디어미학자 루츠 쾨프닉(Lutz Koepnick, 1966~)은 ‘느림에 대하여(On Slowness)’에서 “느림은 감각의 층위를 회복하고, 시간이 중첩되는 방식으로 현실을 사유하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작가의 회화는 바로 그 느림의 전략 안에서 선 하나, 여백 하나로 감정을 천천히 풀어내고, 관람자를 정서 속에 오래 머물게 합니다.
■ 생태적 감각과 정서적 풍경
작품 속 자연은 늘 보아오던 풍경이 아닙니다. 찻잔, 나뭇잎, 그림자, 햇살 같은 요소들은 작가의 내면을 통과한 후 감정의 도식으로 재구성된 ‘어떤 장면’입니다.
영국의 생태철학자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 1968~)은 ‘하이퍼오브젝츠(Hyperobjects)’에서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문제는 일상의 미세한 감각으로 스며든다”고 말했습니다.
기후, 생태, 관계 같은 거대한 조건들이 찻잔의 김이나 나뭇잎의 떨림처럼 작고 사적인 감각 속에 배어 있다는 관점입니다.
또 다른 영국의 미술사학자 티제이 데모스(T. J. Demos, 1966~)는 ‘인류세에 반하여(Against the Anthropocene)’에서 “예술은 생태 위기를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잃어버린 감응(感應)의 구조를 다시 상상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작가의 회화는 이 두 이론을 기반으로, 자연을 감정의 매개로 다루며, 감정을 재배치하고 감각을 재구성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서적 생태계를 만들어냅니다.
■ ‘제주’라는 장소에서, 감정의 서사를 짓다
작가는 제주라는 장소에서 개인의 정서, 자연의 조각, 삶의 감각을 모아 자신만의 정서적 풍경으로 재구성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대중적으로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Hayao Miyazaki, 1941~)의 영화 감성과도 통합니다.
미야자키의 세계에서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감정이 움직이는 중심 무대입니다. 인물의 상처, 성장, 화해는 숲과 바람, 하늘과 빛과 함께 일어납니다.
작가의 회화도 자연을 수단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감정의 호흡과 삶의 시간’이 깃들어 있습니다.
데모스의 ‘지속 가능한 감각의 조건’이란, 바로 이와 같은 방식 즉 일상의 자연 속에서 감정을 되살리고, 회화를 통해 감응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행위에서 실현됩니다.
제주는 이 정서적 구조가 뿌리내릴 수 있는 풍경이자, 감정이 머무는 ‘시간의 그릇’이 됩니다.
■ 작가의 말, 작가의 시간
작가는 “선 하나, 하나를 그어내며 오롯이 내 안의 나를 마주한다. 평화 그리고 쉼”이라고 자신의 작업을 정의합니다.
이는 회화를 위한 형식적 언어를 넘어, 감정을 마주하는 사유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동덕여자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작가는 중국 노신미술대학에서 중국화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01년 제주도미술대전 한국화 부문 대상, 2003년 경인미술대전 우수상 등을 수상했고,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제주도립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등 주요 기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습니다.
최근에는 실감미디어 작업으로도 영역을 넓히며, 오는 7월 서울로미디어캔버스 프로젝트에도 참여할 예정입니다.
이번 전시는 22일까지 이어지며, 관람은 무료입니다.
운영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입장 마감은 오후 5시 30분입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저작권자 © JIBS 제주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공필화 기반 드로잉·회화, 이미선 작가 17번째 개인전
13~22일, 제주시 ‘아라갤러리’에서 개최
이미선 作
# 우리는 매일 수많은 이미지를 보고, 수많은 정보에 반응합니다.
하지만 그중 얼마나 ‘진짜로’ 보고, 느끼고 그래서 멈춰 섰을까.
미국 하버드대학교 미술사학자 제니퍼 로버츠(Jennifer L. Roberts, 1969~)는 학생들에게 단 한 점의 그림을 세 시간 동안 바라보게 했습니다.
처음엔 불만이 터졌지만, 시간이 흐르자 학생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소년의 귀와 배경 커튼 주름의 유사성, 손가락과 찻잔의 직경 비율 같은 ‘보이지 않던 연결’들이 서서히 떠올랐습니다.
오래 바라보는 일은 그림을 바꾸지 않지만, 그림을 보는 시선을 바꿀 수 있습니다.
‘느림’은 더 이상 과거의 미덕이 아닙니다.
독일 출신 미디어미학자 루츠 쾨프닉(Lutz Koepnick, 1966~)은 저서 ‘느림에 대하여(On Slowness)’에서 느림을 “가속 사회에서 감각의 층위를 복원하는 현대적 미학 전략”이라 설명합니다.
그런 느림의 미학, 감정의 회복을 조용히 실천하는 전시입니다.
이미선 作
13일 제주시 아라갤러리에서 개막한 이미선 작가의 17번째 개인전, ‘치유의 정원에서 커피 한잔 하실래요’입니다.
전시에서는 공필화 기반의 드로잉과 평면 회화로 구성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 감정의 회복, 선으로 그린 정원
작가는 제주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감귤나무, 나뭇잎, 찻잔, 햇살의 결처럼 사소한 일상의 풍경을 천천히 바라보고 손끝으로 옮겨왔습니다.
대상은 그저 묘사되는 것이 아닌, 그 안에 깃든 감정과 시간의 결을 선묘로 직조한 정서적 풍경으로 제시됩니다.
정교한 선 하나, 고요한 여백 하나는 관람자의 마음을 서서히 건드립니다.
작가는 “지금은 감정이 다시 느려질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시는 선 하나로 말하고, 여백 하나로 마음을 데우는 시간을 꺼내 보게 합니다.
우리는 어느덧 그 감정 앞에 조용히 멈춰 섭니다.
이미선 作
■ 정교함을 넘어선 감정의 선, 공필화에서 출발하다
작가의 회화는 공필화(工筆畵) 전통에서 출발합니다.
공필화는 중국 전통 회화 기법 중 하나로, 정밀한 선묘와 치밀한 색감의 배합을 통해 섬세하고 사실적인 화면을 구성하는 양식입니다.
작가는 이 회화 기법을 단지 ‘정교함’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선은 감정을 따라 흔들리고, 그 밀도는 마음의 진폭을 따라 결정됩니다.
전통 회화의 규범 안에서 출발했지만, 작가의 선은 정서를 회화적으로 번역하는 도구로 전환됩니다.
그래서 이 회화는 묘사라기보다는 감정의 결을 따라 짜여진 풍경에 가깝습니다.
선은 사물의 외곽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울림을 그려내는 선이 됩니다.
바로 그 점에서 공필화는 작가에게 ‘기법’이 아니라 감정의 언어로 작동합니다.
■ 슬로우 아트와 감응의 미학
작가의 회화는 빠른 감상이나 즉각적인 반응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래 머물며 바라보는 ‘지연된 시선’이 필요합니다.
앞서 로버츠 교수가 말했듯, 충분한 시간이 쌓이면 화면 속 구조와 감정의 결이 서서히 드러나고, 그림은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느림은 단지 감상의 태도를 넘어, 감각을 복원하는 전략적 지연입니다.
독일의 미디어미학자 루츠 쾨프닉(Lutz Koepnick, 1966~)은 ‘느림에 대하여(On Slowness)’에서 “느림은 감각의 층위를 회복하고, 시간이 중첩되는 방식으로 현실을 사유하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작가의 회화는 바로 그 느림의 전략 안에서 선 하나, 여백 하나로 감정을 천천히 풀어내고, 관람자를 정서 속에 오래 머물게 합니다.
■ 생태적 감각과 정서적 풍경
작품 속 자연은 늘 보아오던 풍경이 아닙니다. 찻잔, 나뭇잎, 그림자, 햇살 같은 요소들은 작가의 내면을 통과한 후 감정의 도식으로 재구성된 ‘어떤 장면’입니다.
영국의 생태철학자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 1968~)은 ‘하이퍼오브젝츠(Hyperobjects)’에서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문제는 일상의 미세한 감각으로 스며든다”고 말했습니다.
기후, 생태, 관계 같은 거대한 조건들이 찻잔의 김이나 나뭇잎의 떨림처럼 작고 사적인 감각 속에 배어 있다는 관점입니다.
또 다른 영국의 미술사학자 티제이 데모스(T. J. Demos, 1966~)는 ‘인류세에 반하여(Against the Anthropocene)’에서 “예술은 생태 위기를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잃어버린 감응(感應)의 구조를 다시 상상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작가의 회화는 이 두 이론을 기반으로, 자연을 감정의 매개로 다루며, 감정을 재배치하고 감각을 재구성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서적 생태계를 만들어냅니다.
■ ‘제주’라는 장소에서, 감정의 서사를 짓다
작가는 제주라는 장소에서 개인의 정서, 자연의 조각, 삶의 감각을 모아 자신만의 정서적 풍경으로 재구성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대중적으로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Hayao Miyazaki, 1941~)의 영화 감성과도 통합니다.
미야자키의 세계에서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감정이 움직이는 중심 무대입니다. 인물의 상처, 성장, 화해는 숲과 바람, 하늘과 빛과 함께 일어납니다.
작가의 회화도 자연을 수단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감정의 호흡과 삶의 시간’이 깃들어 있습니다.
데모스의 ‘지속 가능한 감각의 조건’이란, 바로 이와 같은 방식 즉 일상의 자연 속에서 감정을 되살리고, 회화를 통해 감응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행위에서 실현됩니다.
제주는 이 정서적 구조가 뿌리내릴 수 있는 풍경이자, 감정이 머무는 ‘시간의 그릇’이 됩니다.
이미선 作
■ 작가의 말, 작가의 시간
작가는 “선 하나, 하나를 그어내며 오롯이 내 안의 나를 마주한다. 평화 그리고 쉼”이라고 자신의 작업을 정의합니다.
이는 회화를 위한 형식적 언어를 넘어, 감정을 마주하는 사유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동덕여자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작가는 중국 노신미술대학에서 중국화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01년 제주도미술대전 한국화 부문 대상, 2003년 경인미술대전 우수상 등을 수상했고,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제주도립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등 주요 기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습니다.
최근에는 실감미디어 작업으로도 영역을 넓히며, 오는 7월 서울로미디어캔버스 프로젝트에도 참여할 예정입니다.
이번 전시는 22일까지 이어지며, 관람은 무료입니다.
운영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입장 마감은 오후 5시 30분입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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