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09년 10월 하얼빈.
안중근 의사가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합니다.
당시 이 소식은 하와이에도 전해졌습니다.
하와이 동포의 선언문을 보면, 안중근 의사의 이름은 몰랐지만, 이번 의거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렸습니다.
이후 안중근 의사의 재판 소식이 알려지자, 재판 비용에 대한 대대적인 모금 운동이 전개됐습니다.
북미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하와이에서만 모금이 이뤄졌습니다.
모금은 4개월 동안 진행됐는데, 하와이에 거주하던 한인 이민자들이 적게는 25센트에서 15달러까지 자발적으로 자금을 보탰습니다.
당시 모금 금액은 2,900여 달러나 됐습니다.
김도형 /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굉장히 힘들고, 임금도 낮았기 때문에 그들이 받는 임금에서 독립운동자금이 차지한 비율이 굉장히 높은 편이었죠"
이 모금에 참여한 제주도민 11명의 명단이 처음 확인됐습니다.
특히 제주 출신 김영선 씨는 당시 월급의 3분의 1 수준이나 되는 5달러를 의연금으로 낸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당시 급여의 절반을 숙식비 등으로 지출해야 했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금액입니다.
이덕희 /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
"(당시) 한국에서 온 사람이 4,000명이 있었어요. 1,600명 정도가 안중근 의사 재판 기금을 냈고, 그중에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더 나올 수는 있지만 11명 정도의 제주사람이 동참했다"
어떻게 하와이에 제주도민들이 머물고 있었을까?
지난 1902년 12월부터 인천 제물포항을 출항해 하와이로 한인 이민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당시 이민자 중에는 제주도민도 60에서 80명가량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덕희 /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
"(1903~1905년) 7,400명이 하와이에 옵니다. (1910년까지) 2,000명 정도는 한국에 다시 돌아가요. 미국 본토로 들어가기도 해서, 1910년 인구 조사에 4,533명이 하와이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와요"
특히 하와이 한인 사회는 독립자금 모금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쟁 과정에서 잡힌 한인 포로들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하와이 호노울리울리 수용소에는 제주도민 16명을 포함해 한국인이 2,700여 명으로 가장 많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덕희 /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
"포로들을 돕자고 하는 운동들이 있어서 청년들이 돈을 모아서 크리스마스 선물도 주고, 교회에서는 영어도 가르치고.."
이역만리 떨어진 하와이의 극한 폭염 속 10시간 넘게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며 벌어들인 귀중한 돈.
십시일반 모인 그 자금은 그토록 바라던 광복의 길을 여는 마중물이 됐습니다.
JIBS 김동은입니다.
(영상취재 윤인수·화면제공 하와이한인방송)
JIBS 제주방송 김동은 (kdeun2000@hanmail.net) 윤인수 (kyuros@jibs.co.kr) 기자
<저작권자 © JIBS 제주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