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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은 작품보다 먼저 신발을 더럽힌다”… 관덕정 앞 원도심, 청년 예술가들은 왜 스스로 ‘이세계’ 안으로 들어갔나
2026-05-13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비닐로 봉합된 벽·흙바닥·공중에 매달린 신체 흔적들
청년 작가 4인의 공동 작업·원도심·일상이 뒤섞인 공간
세이브 갤러리 《이세계》가 남긴 머무름과 미완의 시간
관덕정 앞 원도심 세이브 갤러리 전경. 청년 작가들이 함께 머물며 작업한 공간 전체가 기획전 《이세계》의 전시장으로 확장됐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흙이 신발을 붙잡습니다.

바닥을 밟을 때마다 천천히 속도를 늦추게 됩니다.
눌린 자국이 남고, 축축한 기운까지 공간 아래 가라앉아 있습니다.

벽은 비닐로 임시 봉합돼 있습니다.
천장에는 신체 일부처럼 보이는 형상들이 위태롭게 매달려 흔들리고, 곳곳에 아직 치워지지 않은 작업 흔적과 메모, 오브제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정돈된 전시장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누군가 완성한 결과를 보여주는 장소라기보다, 사람들이 오래 머물다 방금 비워둔 공간입니다.

제주시 관덕정 앞 원도심 세이브 갤러리에서 12일 시작한 기획전 《이세계》입니다.
김규리·이제용·임재현·유경림 작가가 참여했고, 전시 준비 기간 공간을 함께 사용하던 청년 작가들이 자연스럽게 결성한 콜렉티브 ‘R1’이 기획을 맡았습니다.

16일 여다함 작가의 퍼포먼스 ‘주먹쥔코끼리’도 예정돼 있습니다.


《이세계》는 일반적인 청년 작가 그룹전 방식으로는 쉽게 읽히지 않습니다.
누가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지보다, 지금 청년 예술가들이 어떤 공간 안에서 버티고 있는지를 먼저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전시장 바닥 전체에 흙을 설치해 관객과 작가가 함께 밟으며 변화하는 시간을 작업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제용 作.

■ ‘완성된 작품’보다 먼저 놓인 것들… 발자국·메모·멈춰 선 테이블

전시장 안에는 끝내 정리되지 않은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흙 위 발자국, 벽에 남겨진 임시 고정 흔적, 뒤엉킨 전선과 메모, 무언가를 만들다 잠시 멈춘 듯한 테이블.

화이트큐브 특유의 매끈한 질서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여러 사람이 같은 공간 안에서 머물고 지나간 시간이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전시는 실제로 작가들이 세이브 갤러리를 공동 작업실처럼 사용하면서 시작됐습니다.
함께 머물고, 작업하고, 실패하고, 침묵하던 시간이 천천히 쌓였습니다.
공동 작업 <interactive prototype desk 0.1>. 참여 작가들이 함께 머물며 남긴 메모와 오브제, 작업 흔적들이 전시 일부로 놓였다.

공간은 그 시간을 정리하거나 감추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냅니다.
특히 공동 작업 <인터랙티브 프로토타이프 데스크 0.1(interactive prototype desk 0.1)>은 이번 전시의 중심축으로 놓여 있습니다.

책상 위에는 메모와 작업 도구, 오브제들이 무질서하게 남아 있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결과물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은 시간을 지나며 남긴 흔적들입니다.

작가들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나누며 지나온 시간을 이 작업 안에 담았습니다.

세이브 갤러리를 운영하는 장승원 작가는 “처음부터 완성된 전시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며 “비닐이나 흙, 정리되지 않은 구조들까지도 지금 청년 작가들이 놓인 상태 자체라고 생각했다”고 전시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어 “비어 있던 원도심 공간 안에서 함께 작업하고 머무는 과정 자체가 이번 전시의 중요한 일부였다”며 “결과보다 그 시간을 공간 안에 남겨두고 싶었다”고 덧붙였습니다.

관람객 역시 작품 바깥에 안전하게 서 있을 수 없습니다.
흙을 밟고 좁은 틈을 지나며, 흔들리는 구조물 아래를 통과하며 공간 안으로 들어갑니다.

전시는 감상보다 접촉에 먼저 반응합니다.
노출된 구조물과 흔적을 통해 미완 상태의 공간 감각을 보여준다. 임재현 作.

■ 현실 도피가 아니라, 끝내 자리 잡지 못한 시간... ‘이세계’

전시 제목은 묘하게 정확합니다.
‘이세계’.

원래는 현실 바깥의 판타지 공간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 그 말은 현실 도피와 정반대로 움직입니다.

청년 예술가들에게 작업실은 작품만 만드는 공간이 아닙니다.
생활과 노동, 관계와 생존, 작업과 체류가 한꺼번에 뒤섞이는 장소입니다.

이번 《이세계》는 그 상황을 숨기지 않습니다.
천장에 매달린 형상들은 신체 같다가도 버려진 껍질처럼 흔들리고, 흙바닥 위 작은 식물은 가까스로 남아 있는 존재처럼 놓여 있습니다.

끝내 완전형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전시는 지나가는 시간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흙 설치는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핵심 장치입니다.
관객과 작가가 함께 밟은 흙은 시간이 흐를수록 단단해지고, 결국 하나의 디딤돌로 남게 됩니다.
같은 공간 안에서 머물고 지나간 시간이 천천히 형태를 만들어갑니다.
중첩된 선과 매달린 구조를 통해 관계와 감각의 흔적을 시각화했다. 유경림 作.

■ 원도심, 배경이 아닌 상태

《이세계》가 오래 남는 이유는 장소 때문이기도 합니다.

최근 제주의 원도심은 빠르게 소비되고 있습니다.
오래된 건물과 골목은 사진 배경이 되고, 낡은 시간은 복고 이미지처럼 소비됩니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원도심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세이브 갤러리는 비어 있었고, 낡아 있었고, 아직 용도가 끝나지 않은 장소였습니다.
바로 그 상태가 전시와 맞물립니다.

비닐로 막아둔 벽, 드러난 구조물, 흙 위에 놓인 임시 테이블들.
그것들을 감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완의 상태를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그 순간 원도심은 배경이 아니라 전시 일부가 됩니다.

《이세계》는 완결된 세계를 보여주려는 전시가 아닙니다.
같은 공간 안에서 작업하고 머물며 지나온 시간, 그리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흔적들을 드러냅니다.
신체를 연상시키는 형상을 공간 안에 매달아 불안정한 감각과 긴장 상태를 드러냈다. 김규리 作.

김규리 작가는 지난해 《제주청년작가전》 선정 작가로 이름을 올렸고 올해 제주 야크마을에서 개인전 《파노라마》를 열며 공간과 감각의 층위를 탐구해 왔습니다.
이제용 작가는 《아트페스타 인 제주-광장:사이 산지천》, 《제주 청년 예술 네트워킹 파티 circle》 등에 참여하며 지역 기반 청년 예술 네트워크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유경림 작가는 개인전 《로렌스 애니웨이》와 기획전 《결핍에서 낙원까지》 등을 통해 관계와 감정의 층위를 작업 안으로 끌어들여 왔고, 임재현 작가는 올해 산지천갤러리 기획전 《집먹이》 참여 등을 통해 지역 공간 기반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전시는 오는 23일까지 관덕정 앞 세이브 갤러리에서 열립니다. 운영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입니다.
전시 기간 작가들이 상주하며 관람객들을 만날 예정입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저작권자 © JIBS 제주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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