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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 한 줄에 해녀·농부·여행자를 앉혔다… 제주 원도심에 온 어느 ‘자청비’의 식탁
2026-08-27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잇단 사건·사고 뒤 흔들린 제주 이미지… “사건 너머 사람과 일상의 제주 보여주고 싶다”
경력잇는여자들, 돌봄·창직 지나 관광·미식·유통으로… 5년간 품은 구상 현실로
금능 해산물·구좌 밭작물·애월 축산물·남원 감귤… 9월 15일 공식 오픈
제주 원도심 중앙로 44 ‘제주소풍’에서 진행되는 김밥 팝업 안내 이미지. 경력잇는여자들이 선보인 ‘1987 자청비’는 제주 원물과 생산자, 여행객을 음식과 체험으로 연결하는 로컬 브랜드다. (경력잇는여자들 제공)

최근 제주를 설명하는 말 가운데는 불안도 섞여 있습니다.
잇따른 사건·사고를 거치며 ‘무서운 섬’이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제주에 사는 김영지 대표 역시 그 두려움에서 비켜서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다만 지금 다시 꺼내 보여주고 싶은 제주는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관광지가 되기 훨씬 전부터 이 땅에 터를 잡고 밭을 일구고, 바다에 몸을 던져 삶을 이어온 사람들입니다.

몇몇 특수한 사건이 섬의 폐쇄성과 지역성이라는 말과 엮이며 제주 전체의 모습처럼 굳어지는 상황을, 그래서 김 대표는 안타깝게 바라봤습니다.


화려한 팝업보다 사람을 앞세웠습니다.
저마다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생산자와 이웃, 그들이 만든 음식과 물건을 한 공간에 모았습니다. 제주의 자연과 사람들이 자신에게 건넸던 사랑과 치유를 여행자에게도 전하고 싶다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김 대표는 “제주의 자연과 사람들이 우리에게 준 사랑과 치유를 제주를 찾는 사람에게도 전하고 싶다”며 “큰 기대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와서 제주를 느껴줬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마음으로 만든 곳이 제주 원도심 중앙로 44의 ‘제주소풍’입니다.
제주 여성 커뮤니티 ‘경력잇는여자들’이 선보인 로컬 브랜드 ‘1987 자청비’의 거점 공간입니다.
지난 5월 가오픈했고 다음 달 15일 공식 오픈식을 열어 본격 운영에 들어갑니다.


이곳에서 김밥 한 줄을 펼치면 제주 지도가 나옵니다.
금능 바다에서 온 해산물 옆에 구좌 밭에서 자란 작물이 놓입니다. 애월의 축산물과 남원의 감귤도 한 식탁을 채울 재료입니다.

그 음식을 설명하는 사람은 아이를 키우며 일을 쉬었거나, 다시 일하고 싶어도 돌아갈 자리를 찾기 어려웠던 제주 여성일 수 있습니다.
맛보는 이는 여행자입니다. 한 끼를 고른 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제주를 추천받고, 피크닉 세트를 들고 거리로 나갑니다.
마음에 든 제주 생산자의 상품은 여행가방에 담깁니다.

바다와 밭에서 시작한 제주가 여성의 일을 거쳐 여행객의 하루로 흘러갑니다.
원도심의 작은 공간 안에 끊어진 경력을 다시 이어보자며 모였던 여성들이 돌봄과 교육, 창직을 지나 관광과 유통까지 움직여온 시간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1987 자청비’가 소개하는 제주 동서남북의 사람과 삶. 제주에서 밭을 일구고 바다에서 일하며 살아온 지역민의 이야기를 여행자에게 전하는 콘텐츠로 구성됐다. (경력잇는여자들 제공)

■ 돌봄에서 시작했지만, 관광은 오래전부터 그려왔다

김영지 대표에게 관광은 새로 꺼낸 사업 분야가 아닙니다.
관광을 전공하고 관련 분야에서 일해오다, 경력잇는여자들이 자리를 잡아가던 때부터 제주 관광 콘텐츠와 지역자원을 어떻게 연결할지 고민했습니다.

구상 초창기에는 공부와 휴가를 결합한 ‘스케이션’, 제주 지역자원의 가치를 알리고 판매로 잇는 프로그램도 들어 있었습니다.

먼저 풀어야 할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계속 일하고 싶은 여성들이 갈 곳이 많지 않았습니다.

김 대표 역시 그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제주에서 대학 전임교수로 일했지만 출산과 육아를 함께 감당하기 어려워 일을 내려놓았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여성들이 모였고 2021년 경력잇는여자들이 출발했습니다.
돌봄 강사를 키우고 필요한 가정과 연결했습니다. 교육과 창직 프로그램을 이어가면서 여성들이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통로도 넓혀왔습니다.

그렇게 사람과 일을 잇는 동안 처음 품었던 관광 구상도 조금씩 모양을 갖췄습니다.
음식이 들어왔고 생산자가 합류했습니다. 그 뒤에 여행자가 들어왔습니다.
그 조각들이 5년을 돌아 ‘1987 자청비’에서 만났습니다.

제주 신화 『세경본풀이』의 자청비를 제주 밭과 돌담을 배경으로 재구성했다. 자청비는 곡식의 씨앗을 가져와 농경의 풍요를 일군 인물로 전해진다. (AI 생성)

■ 자청비를 불러낸 여자들

이름은 제주 신화 『세경본풀이』에서 가져왔습니다.
자청비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농경의 씨앗을 가져와 풍요를 일군 인물입니다.

경력잇는여자들은 오래된 신화의 주인공을 지금 제주에서 다시 불러냈습니다.

다시 일하려는 여성에게는 새로운 일을, 제주 생산자에게는 또 다른 판매 경로를 만들고 여행자에게는 자신의 취향으로 제주를 고르게 하겠다는 구상입니다.

브랜드 문구는 ‘Just Ask. Just Jeju.’
그래서 제주소풍에서는 질문부터 손님을 맞이합니다.  매장 입구의 ‘자청 테스트’를 통해 음식과 여행 취향을 살핀 뒤 식탁과 소풍, 선물 가운데 맞는 경험으로 연결합니다.

제주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답부터 건네기보다 어떤 제주를 원하는지 먼저 묻습니다.

여행객은 그렇게 자기 취향에 맞는 제주를 골라갑니다.

■ 해녀의 바다와 농부의 밭이 김밥 안에서 만난다

‘자청비의 식탁’에는 재료의 출신지가 따라붙습니다.
금능 해녀의 해산물과 구좌 여성 농부의 밭작물, 애월 청년 생산자의 축산물, 남원 농가의 감귤 등 제주 동서남북의 생산자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원물을 연결할 수 있게 구성했습니다.

대표 메뉴는 자청 김밥과 자청 라면입니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음식이지만 안에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제주 각 지역의 맛과 생산자를 한 끼에 담을 수 있습니다.

생산자와 직거래하는 공급 구조를 다듬고 일부 원물은 진공 동결건조 등을 거쳐 여행용 식품으로 개발할 계획입니다.

지난 5월 가오픈 당시에도 권역별 생산자 공급망 정비를 정식 운영에 앞선 과제로 제시했습니다.
제주에서 먹은 맛을 여행가방에 넣어 가져갈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취지입니다.

생산자에게는 새로운 판매 경로가 생기는 방식입니다.
관광객이 낸 한 끼 값이 어느 바다와 밭에서 출발했는지, 그 소비를 지역 생산자에게 어떻게 돌려놓을지까지 함께 설계했습니다.

김밥 한 줄도 이곳에서는 먹고 끝나는 메뉴가 아닙니다. 따로 떨어져 있던 제주를 한 식탁에 모읍니다.
제주에 기항한 크루즈선에서 관광객들이 하선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소풍은 체류 시간이 짧은 크루즈 관광객과 외국인 개별여행객까지 겨냥해 제주 각 지역의 먹거리와 사람, 체험을 원도심에서 연결한다.

■ 손님을 붙잡지 않는다… 먹었으면 다시 제주로

‘제주소풍’이라는 이름은 가게 밖으로 나갈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음식을 먹은 뒤 피크닉 세트를 빌리고 취향에 맞는 소풍 코스와 체험 프로그램을 추천받습니다. 지역 생산자의 제품과 자체 개발 상품도 만날 수 있습니다.

최근 제주 관광은 마을을 달리며 자연과 상점을 만나는 러닝 관광부터 워케이션, 런케이션까지 여행 방식이 빠르게 세분화되고 있습니다.
어디를 봤느냐보다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며 어디에서 소비했느냐가 여행의 경험을 채웁니다.

제주소풍이 자리 잡은 중앙로 44는 제주 원도심 여행자센터 맞은편입니다. 외국인 개별여행객과 크루즈 관광객도 주요 손님으로 보고 있습니다.
27일 제주관광공사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19일까지 제주 크루즈 입도객은 44만 8,938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2% 늘었습니다.

체류 시간이 짧은 크루즈 관광객이 제주 곳곳의 생산자를 직접 찾아가기는 어렵습니다. 제주소풍은 원도심에서 여러 지역의 맛과 사람을 만나고, 그 관심을 다른 소비와 이동으로 이어가도록 짰습니다.

원도심에서 먹은 한 끼가 또 다른 제주로 향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제주 여성 커뮤니티 ‘경력잇는여자들’ 로고. 경력잇는여자들은 경력보유여성의 일과 돌봄을 연결하는 활동에서 출발해 교육과 창직, 관광·유통 분야로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경력잇는여자들 제공)

■ 여성의 경력을 ‘로컬 도슨트’로

이 사업에서 음식 못지않게 중요한 자원은 사람입니다.
경력잇는여자들은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관광객을 상대할 ‘로컬 도슨트’를 육성한다는 계획입니다.

주문을 받고 음식을 건네는 데 역할을 한정하지 않습니다.
오늘 먹는 재료가 어디에서 왔는지 설명하고 여행자의 취향에 맞춰 제주를 추천합니다.

외국인 관광객을 응대하고 매장에서 쌓이는 취향과 소비 데이터도 운영에 활용할 예정입니다.
이를 준비하면서 제주도 여성창직아카데미 지원을 통해 서비스경영자격(SMAT)과 믹솔로지스트 자격을 취득하며 관광객 응대와 미식 운영에 필요한 역량을 갖췄습니다.

근무 방식도 돌봄과 일을 병행할 수 있도록 유연하게 설계한다는 방침입니다.
여기서 경력보유여성의 ‘재취업’이라는 익숙한 공식은 달라집니다.

예전에 하던 일로 돌아갈 자리만 찾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경험과 제주가 가진 자원을 섞어 새로운 일을 직접 만들어갑니다.
경력잇는여자들이 돌봄에서 창직으로, 다시 관광과 유통으로 보폭을 넓힌 이유입니다.

■ 지원금은 문을 열어준다… 장사는 그다음

문을 여는 과정에는 공공 지원도 보탬이 됐습니다.
제주소풍은 제주원도심활성화자율상권조합의 공실 신규창업 지원사업에 선정돼 리모델링 지원을 받았습니다.

한국관광공사 관광벤처기업과 제주사회적경제네트워크 제주관광 로컬크리에이터 기업에도 선정됐습니다.
문화공간 휴와 한복·식문화 체험을 결합하고, 자청 김밥과 자청 라면의 레시피 표준화 등 상품을 다듬는 작업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원사업이 손님까지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김밥은 다시 먹고 싶을 만큼 맛있어야 하고, 소풍은 돈과 시간을 들일 만큼 재미있어야 합니다. 선물 역시 ‘제주’라는 이름을 떼고도 사고 싶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산자의 소득이 생기고 여성의 일자리도 남습니다.

좋은 취지만으로 오래 버티는 가게는 없습니다.
‘여성’, ‘로컬’, ‘상생’이라는 설명을 모두 걷어낸 뒤에도 소비자가 지갑을 열 것인가.
9월 15일 공식 오픈 이후 1987 자청비가 시장에서 받아야 할 질문입니다.
김영지 경력잇는여자들 대표. 김 대표는 제주 원도심에 로컬 브랜드 ‘1987 자청비’의 거점 공간 ‘제주소풍’을 마련해 제주 생산자와 경력보유여성, 여행객을 잇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경력잇는여자들 제공)

■ 처음에는 경력을 이었다… 5년 뒤, 잇는 것이 많아졌다

‘경력잇는여자들’이라는 이름에는 처음부터 동사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잇다.’

처음에는 일을 멈추기 전의 나와 다시 일을 시작한 나 사이를 잇는 말이었습니다.
이후 일하고 싶은 여성과 돌봄이 필요한 가정을 연결했고, 배움에서 다시 일터로 가는 길도 만들었습니다.

5년이 지나자 그 선이 더 길어졌습니다.
해녀의 바다가 여행자의 식탁으로 이어지고 농부의 밭이 원도심의 가게와 만납니다. 제주를 찾은 여행객도 그 사이로 들어옵니다.
경력잇는여자들이 전혀 별개 사업을 시작했다고만 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이 해온 일은 여전히 ‘잇는 일’입니다.
달라진 것은 그 선의 길이입니다.
여성의 경력에서 시작한 선 위에 이제 제주의 생산자와 여행객, 원도심 상권이 올라왔습니다.

신화 속 자청비는 먼 길 끝에 씨앗을 가져왔습니다.
원도심에 등장한 2026년의 자청비가 가져온 씨앗은 조금 다릅니다. 누군가에게는 다시 시작한 일이고, 누군가에게는 새로 열릴 판로입니다.
관광객은 그 사이에서 자신이 고른 제주 한 끼와 하루를 가져갑니다.

이 연결이 오래 갈지는 이제 매일 문을 여는 가게에서 증명해야 합니다.

김밥 한 줄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제주 어디까지 이어질지.
자청비의 다음 행선지는 아직 지도에 없습니다.

제주소풍 프로그램 참여 신청과 세부 내용은 ‘경력잇는여자들’ 공식 인스타그램 프로필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청 김밥과 자청 라면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제주소풍’의 식탁. 익숙한 한 끼에 제주 각 지역의 맛과 이야기를 담아내는 구상이다. (AI 생성)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저작권자 © JIBS 제주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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