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제주'
오늘(15)은 74주년 광복절입니다.
일본의 마지막 군사 요새 역할을 했던 제주의 입장에서 광복은 특별했습니다.
일본군이 가장 많이 주둔해 일촉즉발의 위기로 내몰렸던 제주에서 광복의 의미를 김동은 기자가 짚어봤습니다.
(리포트)
한라산 자락에 위치한 해발 1천1백여미터의 어승생악 정상입니다.
콘크리트로 된 일본군 진지가 확인됩니다.
제주에 만들어진 일본군 진지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최후의 저항 본부로 사용하기 위해 제주의 산봉우리마다 진지동굴을 만든 겁니다.
"(제주도민들이) 손에 들고 어깨에 매고 그렇게 올라왔을 겁니다. 또 길 자체도 지금보다 휠씬 더 열악했을 것이구요. 그런데도 시키는 일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이같은 진지 공사에 일흔살 노인까지 제주도민 4만여명이 투입돼 고초를 겪었습니다.
"제주시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이 높은 곳에, 콘크리트로 복잡하게 만들어진 이 동굴 진지는 일제시대 제주도민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지난 1945년 전세가 밀린 일본은 미군의 제주 상륙에 대비해 결 7호작전의 일환으로 중산간 일대 기지 구축에 주력합니다.
1945년 9월이나 10월쯤 미군의 공습에 대비했던 겁니다.
해방 직전, 제주는 20만명의 인명피해를 낸 오키나와 상황과 비슷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는 얘깁니다.
"만약에 미군이 상륙해서 제주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제주는 사이판, 오키나와 등과 같이 제주인들의 많은 피해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일본군이 항복했지만, 미군은 특별히 제주에서 일본의 항복을 다시 받아냅니다.
당시 제주에 주둔한 일본군은 6만명 가량으로 국내에서 가장 많았기 때문입니다.
제주의 입장에서 광복은 단순히 속박의 굴레를 벗어난게 아닌,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겁니다.
"(8.15 광복은) 어떻게 보면 제주도민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기 직전에, 오히려 도민들을 구출해 낸 빛과 같은 해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광복의 기쁨은 불과 3년만에 제주 최대 비극인 4.3으로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제주 광복의 의미를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하는 이윱니다.
JIBS 김동은입니다.
-영상취재 고승한
김동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