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최근 이 시간을 통해 태평양 전쟁 당시 죽음의 강제징용 현장을 전해드렸습니다.
이들 강제징용자 가운데, 구사일생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어디론가 이송됐는데요.
당시 하와이에 있던 포로수용소 현장을 JIBS가 국내 언론사 처음으로 현지 취재했습니다.
김동은 기자입니다.
(리포트)
제주에서 6천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타라와섬에서는 지난 1943년 11월 미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당시 해군 군속으로 타라와섬에 강제징용된 제주도민은 30명.
이중 1명만 가까스로 생존했습니다.
한양자 / 타라와 생존자 故한공섭 딸
"(일본인들이) 큰 모래사장 같은 곳에서 우리 한국 사람들을 다 조센징이라고 총으로 쏘더랍니다. 다 죽은 것으로 알았는데, 아버지가 깨보니까 병원인데, 어디냐 하니까 하와이..."
태평양 여러 섬에서 노역하던 한국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창석 / 사이판 생존자 故 고한천 아들
"(폭격으로) 배가 침몰되면서 뭐라도 떠 있는 것을 잡았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갑자기 잠수함이 나타나서 포로가 됐다는..."
한국인 강제징용 생존자들은 하와이에 왜 갔을까?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
"남태평양 여러 섬에 있다가 미군하고 일본이 싸움하는데 잡고 보니가 이 사람들이 일본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한국인이니까 따로 그 사람들을 하와이로 데려와서..."
하와이의 깊은 계곡.
출입 통제 구역을 지나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하와이에 있던 태평양 최대 규모의 포로 수용소인 '호노울리울리'입니다.
제이 스테데반트 / 미국 국립 유적지 자원 부서 책임자
"첫 번째 수용소는 호놀룰루 항구와 가까운 샌드아일랜드에 있었습니다. 이 수용소는 샌드아일랜드에 감금된 모든 수용자들과 태평양에서 데려온 모든 전쟁 포로들을 옮기기 위해 1943년 지어졌습니다"
이 곳은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데다, 주변에 물이 많아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에 최적의 공간이었습니다.
이 수용소는 49만 7천여 제곱미터로, 축구장 70개가 넘을 정도였습니다.
구역별로 나눠져 국적에 따라 관리가 이뤄졌습니다.
당시 이 곳에 머물렀던 한국인은 2천7백여명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제이 스테데반트 / 미국 국립 유적지 자원 부서 책임자
"수용소에는 약 4천 명의 전쟁 포로가 있었는데, 그들은 일본인,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이탈리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포로 중에서 가장 많았던 수용자는 한국인이었습니다"
이 곳에 머물렀던 한국인 포로들이 만든 자유한인보를 보면,
주소가 제주로 표시된 사람 중 타라와섬 생존자 한공섭 뿐만 아니라 고한천, 신응순 등 16명의 명단이 확인됩니다.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
"한국 분들에게는 전혀 공개가 안됐습니다. (호노울리울리 수용소가) 지난 1948년에 문을 닫았는데 그러고서는 다 잊고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밝혀줄 수 있는 중요한 자리죠"
당시 하와이에서의 생활과 이들의 한국 귀환 이후 삶에 대해선 여전히 제대로된 조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동은 기자
"아직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이 곳 하와이 수용소.
이곳의 제주도민에 대한 추가 진상조사는 아직 우리들의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하와이에서 JIBS 김동은입니다"
영상취재 윤인수
JIBS 제주방송 김동은(kdeun2000@hanmail.net) 윤인수(kyuros@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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