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현장 확인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4·3 피난처와 군경 주둔소에 대해 전해드렸습니다.
피난민들은 군경 토벌 작전에 학살되거나, 붙잡히면 다른 지역 형무소로 이송됐습니다.
형무소에 수감됐던 4·3 수형인 상당수가 행방불명됐지만,
여전히 정확한 진상 조사는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동은 기자입니다.
(리포트)
중산간 숲 속에 대규모로 확인된 집단 피난처.
가시리 주민들이 상당수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토벌대는 이런 피난자들이 1명이라도 있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무차별 학살을 벌였습니다.
가시리에서만 3백명이 넘는 주민이 희생됐고,
제주 전역에서 이와 비슷한 끊임없는 학살이 자행됐습니다.
특히 초토화 작전이 벌어졌던 악몽의 4개월 여 동안 희생자의 70%가 집중됐습니다.
당시 군경 토벌 작전에 붙잡힌 사람들은 극심한 고문과 함께, 불법 군사 재판이 이뤄졌습니다.
이들은 화물선을 타고 다른지역으로 이송돼 전국 14곳의 형무소에 수감돼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양동윤 제주 4·3 도민연대 대표
"4·3 당시 제주에는 형무소가 없었죠. 그래서 재판을 받으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에 징역형을 살아야 되는데 형무소가 없으니까 육지 형무소로 갔거든요. 그런데 이 형무소에 조사를 한 적이 없어요"
대전 골령골은 이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지난 1950년 7월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예비검속자 최대 7천여명이 이 골짜기에서 학살됐습니다.
최근 이 현장에서 유해가 또 확인됐습니다.
"꿈에 이 사무실이 보이더라고요. 사무실 문 앞에서 어떤 아저씨들이 서서 이쪽을 손으로 가르키더라고요"
밭이었던 능선 한쪽에서 사람 뼈가 발견된 겁니다.
긴급 발굴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발굴을 위해 땅을 파봤더니, 매립됐던 작은 도랑이 나타났고,
그 도랑에서 유해가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수습된 유해는 모두 20명 내외로 추산됐습니다.
윤병길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연구원
"계곡 상부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사람들을 이제 그 계곡 안으로 밀어 넣어서 이렇게 매장을 했을텐데 그 때 계곡에서는 물이 흐르는 상황이고, 그러니까 많이 쓸려 내려갔을 거고요"
이 대전 골령골에서는 4·3 행방불명 희생자의 유해가 처음으로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던 4·3 수형인들도 이곳에서 학살됐다는 얘깁니다.
여전히 수많은 희생자들은 신원 확인 조차 안되고 있습니다.
전미경 (사)대전산내사건 피학살자 유족회장
"사실 이 골령골에서 내가 걷기가 가슴이 아파요. 아버지 시신을 넘고 가는 것 같아서...꼭 찾아야죠. 제가 골령골을 떠나지 못하고 헤매는게 아버지를 찾으려고 그래요"
김동은 기자
"이곳 대전 골령골 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는 4·3의 원혼들이 행방불명된채 잠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실태 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전에서 JIBS 김동은입니다"
영상취재 윤인수
JIBS 제주방송 김동은(kdeun2000@hanmail.net) 윤인수(kyuros@jibs.co.kr) 기자
<저작권자 © JIBS 제주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현장 확인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4·3 피난처와 군경 주둔소에 대해 전해드렸습니다.
피난민들은 군경 토벌 작전에 학살되거나, 붙잡히면 다른 지역 형무소로 이송됐습니다.
형무소에 수감됐던 4·3 수형인 상당수가 행방불명됐지만,
여전히 정확한 진상 조사는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동은 기자입니다.
(리포트)
중산간 숲 속에 대규모로 확인된 집단 피난처.
가시리 주민들이 상당수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토벌대는 이런 피난자들이 1명이라도 있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무차별 학살을 벌였습니다.
가시리에서만 3백명이 넘는 주민이 희생됐고,
제주 전역에서 이와 비슷한 끊임없는 학살이 자행됐습니다.
특히 초토화 작전이 벌어졌던 악몽의 4개월 여 동안 희생자의 70%가 집중됐습니다.
당시 군경 토벌 작전에 붙잡힌 사람들은 극심한 고문과 함께, 불법 군사 재판이 이뤄졌습니다.
이들은 화물선을 타고 다른지역으로 이송돼 전국 14곳의 형무소에 수감돼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양동윤 제주 4·3 도민연대 대표
"4·3 당시 제주에는 형무소가 없었죠. 그래서 재판을 받으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에 징역형을 살아야 되는데 형무소가 없으니까 육지 형무소로 갔거든요. 그런데 이 형무소에 조사를 한 적이 없어요"
대전 골령골은 이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지난 1950년 7월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예비검속자 최대 7천여명이 이 골짜기에서 학살됐습니다.
최근 이 현장에서 유해가 또 확인됐습니다.
"꿈에 이 사무실이 보이더라고요. 사무실 문 앞에서 어떤 아저씨들이 서서 이쪽을 손으로 가르키더라고요"
밭이었던 능선 한쪽에서 사람 뼈가 발견된 겁니다.
긴급 발굴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발굴을 위해 땅을 파봤더니, 매립됐던 작은 도랑이 나타났고,
그 도랑에서 유해가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수습된 유해는 모두 20명 내외로 추산됐습니다.
윤병길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연구원
"계곡 상부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사람들을 이제 그 계곡 안으로 밀어 넣어서 이렇게 매장을 했을텐데 그 때 계곡에서는 물이 흐르는 상황이고, 그러니까 많이 쓸려 내려갔을 거고요"
이 대전 골령골에서는 4·3 행방불명 희생자의 유해가 처음으로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던 4·3 수형인들도 이곳에서 학살됐다는 얘깁니다.
여전히 수많은 희생자들은 신원 확인 조차 안되고 있습니다.
전미경 (사)대전산내사건 피학살자 유족회장
"사실 이 골령골에서 내가 걷기가 가슴이 아파요. 아버지 시신을 넘고 가는 것 같아서...꼭 찾아야죠. 제가 골령골을 떠나지 못하고 헤매는게 아버지를 찾으려고 그래요"
김동은 기자
"이곳 대전 골령골 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는 4·3의 원혼들이 행방불명된채 잠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실태 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전에서 JIBS 김동은입니다"
영상취재 윤인수
JIBS 제주방송 김동은(kdeun2000@hanmail.net) 윤인수(kyuros@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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