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에서는 해녀들이 일반 여성들보다 최대 산소 섭취량이 20% 정도 높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20대 해녀의 최대 산소 섭취량을 체중당으로 환산하면 47ml/min/kg인데, 이 값은 당시 국가대표 여자 배구선수들의 평균치 47.6ml/min/kg와 유사하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섭라(제주)에서 야명주(진주)를 진상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어 물질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녀'라는 용어는 나중에야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촌계와 역사 자료 등에 따르면, 제주에서는 '잠녀(潛女)'나 제주도 방언인 '좀녀(녀)' 또는 '좀녜(녜)'라고 불렸고, '해녀'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에 등장해 1980년대 이후에 주로 사용됐습니다. 남성이 아닌 물질하는 여성들이 많은 건, 신체적인 유리함도 있지만, 슬픈 역사도 존재합니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해녀와 비슷한 작업을 하는 남성, 포작인이 있었습니다. 해녀의 상대적인 의미인 해남을 뜻하는데, 포작한(鮑作漢), 포작간(鮑作干), 또는 포작인(鮑作人)으로 불렸습니다. 이들은 어부이면서 동시에 잠수사 역할을 했는데, 얕은 수심에서 해조류를 채집한 해녀와는 달리 깊은 수심에서 전복과 소라, 고동 등을 채취해서 진상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일이 힘들고, 공물로 바쳐야하는 할당량이 늘면서 죽거나 도주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도주를 막기 위해 출국금지령이 생겼지만, 남성 포작인은 줄었고, 해녀들이 공물 할당량을 채워야하는 상황이 생긴 겁니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제주해녀들은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부춘화, 김옥력, 부덕량 열사는 해녀들을 규합하며 시위에 앞장섰고, 모든 해녀 투쟁 참여자를 대표해 '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 요구조건을 내밀며 항일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제주자치도에 따르면, 1932년 해녀항일운동은 1만 7,000여 명이 참가한 제주지역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자 전국에서 유일한 여성 주도의 항일운동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해녀'하면 빠질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고령화' 문제입니다. 제주자치도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현직해녀는 3,437명으로, 이중 60세 이상은 3,136명으로 90% 이상이 고령입니다. 국가무형문화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명맥을 이어나가야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커졌고, 젋은 해녀 양성교육이 절실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제주에서는 2곳의 해녀학교가 있습니다. 법환좀녀마을 해녀학교장을 맡고있는 고승철 법환어촌계장은 "해녀학교 수료생 중 40% 정도가 현직 해녀로 자리를 잡고 있지만, 명맥을 이어나가기엔 부족한 상황"이라며 "해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정책 지원 등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제언했습니다. 한편, 제주에 등록된 대한민국 최연소 해녀는 96년생 정희선 씨로 4년차 해녀입니다. 또 제주에서 활동하는 포작인, 해남은 13명으로 집계됐습니다. ■ "호오이- 호오이-" 고요한 바다에서 들리는 소리? ■ "해녀는 얼마나 잠수할 수 있나요? 일반 여성과 산소 섭취량이 다른가요?" ■ "물질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처음부터 해녀라고 불렸나요?" ■ "물질하는 사람은 왜 여성이 많은 건가요?" ■ 항일운동과 함께한 "제주해녀" ■ 90% 이상 "고령 해녀".."양성교육 절실" "/> JIBS | 전체 뉴스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