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친코' 공개 영상 캡쳐, 재일 제주인 공덕비, 기부금으로 복원되는 남원초등학교, 제주대에 135억원 기부한 재일 제주인 故김창인씨 © JIBS 제주방송
[드라마「파친코」'제주의 아픔 담아냈다']
①생계 위해 떠난 아픈 여정
②제주인이 만든 기적 '이쿠노구'
③세상을 바꿔 낸 '오사카 송금'
④70여년 만에 다시 밟은 '고향 제주'
⑤생생한 '제주 사투리' 이래서 넣었다.
⑥일제에 맞서 지켜 낸 '민족혼·정체성'
⑦기억만으로 전해지는 '아픈 역사'
제주엔 마을마다 공덕비
제주에선 시골마을 어귀마다 비석 여러개가 세워진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비석거리'라고 불려집니다.
마을에 큰 도움을 준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후세에 전하겠다며 세운 공덕비들입니다.
공덕비엔 거의 대부분 재일제주인들의 선행이 기록돼 있습니다.
제주와 오사카 직행 여객선인 '군대환'이 운항한 1922년부터 1945년사이 제주인 5만여명이 오사카로 건너갔습니다.
헐벗은 고향 제주 대신 일자리를 찾아 떠난 길이었습니다.
막노동과 방직공장 노동자, 광부 등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14시간이 넘는 중노동보다 더 힘들었던 건 '자이니치(재일 한국인)'라며 부르는 일본인들의 차별과 천대였습니다.
드라마 '파친코'에서도 매회 일본 경찰의 감시와 학대에 시달리는 재일 한국인들의 삶이 그려져 있습니다.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건 같은 처지의 제주인들이었습니다.
제주 풍습 지켜가며 서로 위안
명절이나 제사때면 같이 모여, 고집스럽게 제주식으로 차례상과 제삿상을 차리고, 고향을 생각하며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병들어 세상을 떠난 제주인이 있으면 몸이라도 고향 제주에 묻어줘야 한다며, 고집스럽게 돈을 모아 5배나 비싼 여객선 운임을 지불하며 고향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이때문에 여객선 '군대환'엔 제주로 보내는 유해를 따로 모시는 별도 공간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오사카에 정착한 제주인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힘든 세월을 견디고 버텨, 잡일을 하던 제주인이 가방공장 사장이 되고, 시장에 좌판을 벌여 장사하던 제주인은 잡화점을 차렸습니다.
드라마 '파친코'의 여주인공 선자의 둘째 아들 모자수처럼 파친코 허드렛일을 하다 파친코 여러개를 소유한 사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1940년대 후반부터 '오사카 송금' 시작
그때부터 오사카의 제주인들은 고향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조금이라도 여윳돈이 생기면 제주로 송금하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오사카 송금'은 1980년대까지 집중됐습니다.
오사카에서 보내진 귀한 돈은 허투루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마을에 전기를 끌어오고, 수도를 연결했습니다.
형편없던 도로도 새로 깔았습니다.
제주에 학교 신설 자금 기부
여기에다 배워야 잘 산다며 학교를 세워달라고 더 많은 '오사카 송금'이 보내져 왔습니다.
'오사카 송금' 덕에 제주엔 1945년부터 3년 사이 초등학교가 44개나 생겼습니다.
2만명이던 초등학생수는 4만명으로 2배나 증가했습니다.
중고등학교도 10개나 신설되면서, 3백명이던 중고등학생이 36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오사카 최대 규모 서점과 파친코를 운영하던 故 김창인씨는 지난 2011년 재일 제주인들을 기억해달라며 제주대학교에 135억원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오사카에서 제주로 감귤 묘목 보내
감귤이 제주를 상징하게 된 것도 재일 제주인들 덕분입니다.
지난 1965년부터 1979년까지 고향에 감귤 묘목 보내기 운동을 벌였습니다.
347만그루의 감귤 묘목이 보내졌고, 감귤 산업이 제주의 생명산업으로 성장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세상을 바꿔낸 '오사카 송금'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 공덕비라도 세우게 된 겁니다.
현존 공덕비 9백여개, 8500여명 기재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한 공덕비는 현재 남아 있는 것만도 900여개가 넘습니다.
공덕비에 새겨진 재일 제주인들은 8500여명.
오사카와 도쿄에서 자리를 잡은 재일 제주인은 거의 모두 고향에 거금을 쾌척했던 겁니다.
재일제주인들이 제주로 돈을 보내온 건 1960년대 이후 파악된 것만 9530여건.
금액은 453억원에 이릅니다.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몇배나 더 되는 액숩니다.
일제의 억압과 부당한 대우 속에도, 버텨내면 좋은 날이 올거라는 희망을 놓치 않았던 드라마 '파친코' 속 재일 제주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제주를 바꿔 낸 '오사카 송금'의 가치를 되짚어 보게 됩니다.
JIBS 제주방송 강석창(ksc064@naver.com) 기자
<저작권자 © JIBS 제주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①생계 위해 떠난 아픈 여정
②제주인이 만든 기적 '이쿠노구'
③세상을 바꿔 낸 '오사카 송금'
④70여년 만에 다시 밟은 '고향 제주'
⑤생생한 '제주 사투리' 이래서 넣었다.
⑥일제에 맞서 지켜 낸 '민족혼·정체성'
⑦기억만으로 전해지는 '아픈 역사'
제주엔 마을마다 공덕비
제주에선 시골마을 어귀마다 비석 여러개가 세워진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비석거리'라고 불려집니다.
마을에 큰 도움을 준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후세에 전하겠다며 세운 공덕비들입니다.
공덕비엔 거의 대부분 재일제주인들의 선행이 기록돼 있습니다.
제주와 오사카 직행 여객선인 '군대환'이 운항한 1922년부터 1945년사이 제주인 5만여명이 오사카로 건너갔습니다.
헐벗은 고향 제주 대신 일자리를 찾아 떠난 길이었습니다.
막노동과 방직공장 노동자, 광부 등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14시간이 넘는 중노동보다 더 힘들었던 건 '자이니치(재일 한국인)'라며 부르는 일본인들의 차별과 천대였습니다.
드라마 '파친코'에서도 매회 일본 경찰의 감시와 학대에 시달리는 재일 한국인들의 삶이 그려져 있습니다.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건 같은 처지의 제주인들이었습니다.
제주 풍습 지켜가며 서로 위안
명절이나 제사때면 같이 모여, 고집스럽게 제주식으로 차례상과 제삿상을 차리고, 고향을 생각하며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병들어 세상을 떠난 제주인이 있으면 몸이라도 고향 제주에 묻어줘야 한다며, 고집스럽게 돈을 모아 5배나 비싼 여객선 운임을 지불하며 고향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이때문에 여객선 '군대환'엔 제주로 보내는 유해를 따로 모시는 별도 공간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오사카에 정착한 제주인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힘든 세월을 견디고 버텨, 잡일을 하던 제주인이 가방공장 사장이 되고, 시장에 좌판을 벌여 장사하던 제주인은 잡화점을 차렸습니다.
드라마 '파친코'의 여주인공 선자의 둘째 아들 모자수처럼 파친코 허드렛일을 하다 파친코 여러개를 소유한 사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1940년대 후반부터 '오사카 송금' 시작
그때부터 오사카의 제주인들은 고향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조금이라도 여윳돈이 생기면 제주로 송금하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오사카 송금'은 1980년대까지 집중됐습니다.
오사카에서 보내진 귀한 돈은 허투루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마을에 전기를 끌어오고, 수도를 연결했습니다.
형편없던 도로도 새로 깔았습니다.
제주에 학교 신설 자금 기부
여기에다 배워야 잘 산다며 학교를 세워달라고 더 많은 '오사카 송금'이 보내져 왔습니다.
'오사카 송금' 덕에 제주엔 1945년부터 3년 사이 초등학교가 44개나 생겼습니다.
2만명이던 초등학생수는 4만명으로 2배나 증가했습니다.
중고등학교도 10개나 신설되면서, 3백명이던 중고등학생이 36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오사카 최대 규모 서점과 파친코를 운영하던 故 김창인씨는 지난 2011년 재일 제주인들을 기억해달라며 제주대학교에 135억원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오사카에서 제주로 감귤 묘목 보내
감귤이 제주를 상징하게 된 것도 재일 제주인들 덕분입니다.
지난 1965년부터 1979년까지 고향에 감귤 묘목 보내기 운동을 벌였습니다.
347만그루의 감귤 묘목이 보내졌고, 감귤 산업이 제주의 생명산업으로 성장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세상을 바꿔낸 '오사카 송금'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 공덕비라도 세우게 된 겁니다.
현존 공덕비 9백여개, 8500여명 기재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한 공덕비는 현재 남아 있는 것만도 900여개가 넘습니다.
공덕비에 새겨진 재일 제주인들은 8500여명.
오사카와 도쿄에서 자리를 잡은 재일 제주인은 거의 모두 고향에 거금을 쾌척했던 겁니다.
재일제주인들이 제주로 돈을 보내온 건 1960년대 이후 파악된 것만 9530여건.
금액은 453억원에 이릅니다.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몇배나 더 되는 액숩니다.
일제의 억압과 부당한 대우 속에도, 버텨내면 좋은 날이 올거라는 희망을 놓치 않았던 드라마 '파친코' 속 재일 제주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제주를 바꿔 낸 '오사카 송금'의 가치를 되짚어 보게 됩니다.
JIBS 제주방송 강석창(ksc064@naver.com) 기자
<저작권자 © JIBS 제주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확 찢어버리고 싶다”.. 김문수의 선전포고, 첫날부터 가짜 진보 정조준
- ∙ "어떡하냐 문수야".. 김문수 만난 이수정 '방긋' 두 손 악수
- ∙ “하루 1만 크루즈객 상륙”.. 전세버스 200대·통역 200명, 제주가 움직였다
- ∙ 침묵 깬 尹 "국힘 경선, 건강함 보여줬다.. 우린 전체주의에 맞서 싸워야" 본선 앞두고 직접 등판
- ∙ “하늘은 열렸는데, 관광은 멈췄다”.. ‘5천 원’ 항공권도 비싸다? “제주, 왜 외면받나”
- ∙ 소방관 부모님들 기내식 먹다 '왈칵'...눈물바다 된 비행기 안
- ∙ “진짜처럼 꾸며야 먹힌다”.. 한동훈, 지귀연 룸살롱 의혹에 ‘프레임 전쟁’ 반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