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친코 공개 영상 캡쳐, 고내리, 고내리 불망비, 재일 고내리 고향방문, 오사카항, 복목환 © JIBS 제주방송
[드라마「파친코」'제주의 아픔 담아냈다']
①생계 위해 떠난 아픈 여정
②제주인이 만든 기적 '이쿠노구'
③세상을 바꿔 낸 '오사카 송금'
④70여년 만에 다시 밟은 '고향 제주'
⑤생생한 '제주 사투리' 이래서 넣었다.
⑥일제에 맞서 지켜 낸 '민족혼·정체성'
⑦기억만으로 전해지는 '아픈 역사'
돈 벌러 떠났던 大阪(대판)
제주의 7,80대 어르신들에겐 오사카라는 지명보다는 오사카의 한자표기 '大阪'의 한자음 그대로 '대판'이 더 익숙합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판'이란 지명이 흔히 사용됐습니다.
드라마 '파친코'의 현대 배경인 1989년, 일본 경제가 이른바 잘 나갔다는 버블경제 시기에도 "돈 벌러 대판간다"며, 임시 일자리를 찾아 오사카로 가는 제주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동남아 근로자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오듯이, 당시엔 오사카에서 1,2년 일하면 목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월읍 고내리 주민 집단 이주
도쿄도 아라카와구에 집단 정착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차별과 천대 속에 방직 공장과 가방공장, 파친코에서 잡일을 하며 버텼던 제주 사람들이 어느덧 자리를 잡아 고향 제주의 친인척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줬습니다.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주민들은 일본으로 집단 이주했습니다.
1917년 고내리 오두만씨가 처음 오사카를 거쳐 도쿄도 아라카와구 방직 공장에 취업한 후 고내리 주민들을 불러들였습니다.
1930년대 일본으로 건너간 고내리 주민이 200명을 넘어섰습습니다.
고내리 주민들이 아라카와구에 집단 주거하면서 재일본 고내리친목회까지 만들어졌습니다.
드라마 '파친코'의 주인공 고한수 부자가 요코하마에 정착하듯이, 일제 강점기 제주인들은 오사카에 도착한 후 일본 여러 지역으로 옮겨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고내리 주민들은 제주 4.3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더 많은 숫자가 일본행을 택했습니다.
1990년엔 아라카와구의 고내리 출신 가구수가 300가구나 됐습니다.
당시 고향 고내리 250가구 보다 더 많았습니다.
고내리 사람들은 주로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서 가방공장,호텔,부동산업 등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1960년 이후 고향 돕기 시작
재일 고내리 제주인들은 1960년 초 첫 고향 방문을 계기로 고향돕기에 나섰습니다.
마을 도로를 포장하고, 전기와 수도, 마을 회관을 짓는데 비용을 댔습니다.
공설 묘지와 현재 애월고 부지를 마련하는데도 많은 돈을 보내왔습니다.
고내리에선 일본으로 건너간 고향사람들의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을 모아 공덕비를 여러개 세웠습니다.
애월 해안도로에 대형 공덕비 세워
2012년엔 그동안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며, 고내리 해안도로에 대형 공덕비인 '在日 高內人 施惠 不忘碑'(재일 고내인 시혜 불망비)까지 만들었습니다.
불망비엔 재일 고내리 출신 800여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재일본 고내리 친목회는 일본 정착 100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친목 모임을 열고, 제주의 전통 풍습을 이어가며 고향을 향한 마음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일제강점기 이후 교래리 집단 이주의 역사는 아직도 제대로 된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기억해야 할 역사 '伏木丸(복목환)'
일제강점기 제주와 오사카를 운항하던 또다른 여객선 伏木丸(복목환) 역시 충분한 기록이 없습니다.
일본 선사가 제주와 오사카를 운항한 여객선 '군대환' 운임은 12엔 50전이었습니다.
가난했던 당시 제주도민들에겐 상당한 액수였고, 운임 인하 요구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수용되지 않았습니다.
반발은 "우리가 탈 배는 우리 손으로" 라는 공감대로 번져 나갔습니다.
결국 1930년 제주도민과 오사카 제주인 4500여명이 출자해 제주통항조합을 만들었고, '蛟龍丸(교룡환)'이란 여객선을 임대해 운항하다 1931년 伏木丸(복목환)을 구입해 오사카 노선에 취항했습니다.
오사카까지 운임을 6엔 50전으로 낮추자, 일본 여객선도 운임을 내렸습니다.
그래도 탑승객은 우리배라며 복목환으로 몰렸습니다.
군대환은 운임을 3엔까지 내렸고, 일본 경찰은 노골적으로 복목환 운항을 방해했습니다.
복목환 탑승객에겐 도항증을 발행해주지 않거나, 꼬투리를 잡아 제주통항 조합원들을 투옥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복목환은 운항을 멈추지 않고, 많은 제주인들을 오사카로 실어날랐습니다.
하지만 계속된 탄압 속에 적자가 늘면서 꼭 2년 후 운항을 멈춰야했습니다.
그 이후 1945년까지 제주와 오사카 노선은 일본 여객선 '군대환'이 독차지 했지만, 멋대로 운임을 올리거나 제주 승객을 차별하는 일은 줄게 됐습니다.
재일 제주인들의 얘기를 다룬 드라마 '파친코'가 일제 강점기 제주와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인들의 역사를 재정리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JIBS 제주방송 강석창(ksc064@naver.com) 기자
<저작권자 © JIBS 제주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①생계 위해 떠난 아픈 여정
②제주인이 만든 기적 '이쿠노구'
③세상을 바꿔 낸 '오사카 송금'
④70여년 만에 다시 밟은 '고향 제주'
⑤생생한 '제주 사투리' 이래서 넣었다.
⑥일제에 맞서 지켜 낸 '민족혼·정체성'
⑦기억만으로 전해지는 '아픈 역사'
돈 벌러 떠났던 大阪(대판)
제주의 7,80대 어르신들에겐 오사카라는 지명보다는 오사카의 한자표기 '大阪'의 한자음 그대로 '대판'이 더 익숙합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판'이란 지명이 흔히 사용됐습니다.
드라마 '파친코'의 현대 배경인 1989년, 일본 경제가 이른바 잘 나갔다는 버블경제 시기에도 "돈 벌러 대판간다"며, 임시 일자리를 찾아 오사카로 가는 제주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동남아 근로자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오듯이, 당시엔 오사카에서 1,2년 일하면 목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월읍 고내리 주민 집단 이주
도쿄도 아라카와구에 집단 정착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차별과 천대 속에 방직 공장과 가방공장, 파친코에서 잡일을 하며 버텼던 제주 사람들이 어느덧 자리를 잡아 고향 제주의 친인척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줬습니다.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주민들은 일본으로 집단 이주했습니다.
1917년 고내리 오두만씨가 처음 오사카를 거쳐 도쿄도 아라카와구 방직 공장에 취업한 후 고내리 주민들을 불러들였습니다.
1930년대 일본으로 건너간 고내리 주민이 200명을 넘어섰습습니다.
고내리 주민들이 아라카와구에 집단 주거하면서 재일본 고내리친목회까지 만들어졌습니다.
드라마 '파친코'의 주인공 고한수 부자가 요코하마에 정착하듯이, 일제 강점기 제주인들은 오사카에 도착한 후 일본 여러 지역으로 옮겨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고내리 주민들은 제주 4.3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더 많은 숫자가 일본행을 택했습니다.
1990년엔 아라카와구의 고내리 출신 가구수가 300가구나 됐습니다.
당시 고향 고내리 250가구 보다 더 많았습니다.
고내리 사람들은 주로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서 가방공장,호텔,부동산업 등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1960년 이후 고향 돕기 시작
재일 고내리 제주인들은 1960년 초 첫 고향 방문을 계기로 고향돕기에 나섰습니다.
마을 도로를 포장하고, 전기와 수도, 마을 회관을 짓는데 비용을 댔습니다.
공설 묘지와 현재 애월고 부지를 마련하는데도 많은 돈을 보내왔습니다.
고내리에선 일본으로 건너간 고향사람들의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을 모아 공덕비를 여러개 세웠습니다.
애월 해안도로에 대형 공덕비 세워
2012년엔 그동안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며, 고내리 해안도로에 대형 공덕비인 '在日 高內人 施惠 不忘碑'(재일 고내인 시혜 불망비)까지 만들었습니다.
불망비엔 재일 고내리 출신 800여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재일본 고내리 친목회는 일본 정착 100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친목 모임을 열고, 제주의 전통 풍습을 이어가며 고향을 향한 마음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일제강점기 이후 교래리 집단 이주의 역사는 아직도 제대로 된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기억해야 할 역사 '伏木丸(복목환)'
일제강점기 제주와 오사카를 운항하던 또다른 여객선 伏木丸(복목환) 역시 충분한 기록이 없습니다.
일본 선사가 제주와 오사카를 운항한 여객선 '군대환' 운임은 12엔 50전이었습니다.
가난했던 당시 제주도민들에겐 상당한 액수였고, 운임 인하 요구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수용되지 않았습니다.
반발은 "우리가 탈 배는 우리 손으로" 라는 공감대로 번져 나갔습니다.
결국 1930년 제주도민과 오사카 제주인 4500여명이 출자해 제주통항조합을 만들었고, '蛟龍丸(교룡환)'이란 여객선을 임대해 운항하다 1931년 伏木丸(복목환)을 구입해 오사카 노선에 취항했습니다.
오사카까지 운임을 6엔 50전으로 낮추자, 일본 여객선도 운임을 내렸습니다.
그래도 탑승객은 우리배라며 복목환으로 몰렸습니다.
군대환은 운임을 3엔까지 내렸고, 일본 경찰은 노골적으로 복목환 운항을 방해했습니다.
복목환 탑승객에겐 도항증을 발행해주지 않거나, 꼬투리를 잡아 제주통항 조합원들을 투옥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복목환은 운항을 멈추지 않고, 많은 제주인들을 오사카로 실어날랐습니다.
하지만 계속된 탄압 속에 적자가 늘면서 꼭 2년 후 운항을 멈춰야했습니다.
그 이후 1945년까지 제주와 오사카 노선은 일본 여객선 '군대환'이 독차지 했지만, 멋대로 운임을 올리거나 제주 승객을 차별하는 일은 줄게 됐습니다.
재일 제주인들의 얘기를 다룬 드라마 '파친코'가 일제 강점기 제주와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인들의 역사를 재정리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JIBS 제주방송 강석창(ksc064@naver.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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